● 회계장부 표지만 내놓은 '깜깜이 노조' vs 천원 단위까지 공개하는 '투명 노조'
"노조 자금은 직원들의 임금입니다. 노조라면 회계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게 당연하죠."
'노동개혁'의 닻을 올리며 노동조합의 '깜깜이 회계'를 바로잡겠다고 나선 정부를 향한 다소 특별한 노조, MZ노조의 발언입니다.
지난 13일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김문수 위원장과 간담회에서 송시영 서울교통공사 올바른노조 위원장은 노조의 회계 투명성 강화 조치에 양대노총 등 거대 노조와는 다른 목소리를 냈습니다.
실제 MZ세대 사무직을 중심으로 조직된 서울교통공사 '올바른노조'와 LG전자 사무직 노조 'LG전자 사람중심 노동조합'은 조합비 수입과 지출 내역을 정기적으로 네이버카페 등 온라인에 공개하고 있습니다.
회계감사 보고서 또한 누구나 내려받아 볼 수 있도록 했고, 조합비 수입과 지출 내역은 1,000원 단위까지 세세하게 공지하고 있습니다.
최근 고용노동부가 정상적인 회계장부를 비치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겠다며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했지만 아예 내지 않거나 표지만 내며 정부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한 기존 노조와는 사뭇 대조적인 행보죠.
20·30대 청년층이 주로 참가한 MZ세대 노조가 회계관리에 열심인 건 단순히 정부의 방침에 동조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들의 우선가치가 정치적·이념적 투쟁이 아닌 '공정과 실리', '합리성'이기 때문입니다.
● 시작은 미약했지만…MZ가 바꾸는 노조지형
MZ세대 노조가 처음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건 지난 2021년 2월 LG전자 '사람중심 사무직노조'가 등장하면서부터 였습니다.
이후 같은 해 주요 대기업과 공공 부문에서도 MZ노조가 잇따라 생겨났죠. MZ노조가 사무직 노조 중심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데요.
기존 노조활동이 제조업 생산직 등 현장 근로자가 중심이 돼 정례적인 파업이나 정치적인 투쟁 위주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 등에 대한 니즈가 큰 사무직들은 노조를 통한 실익을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불법 파업 뿐만 아니라 청년층의 밥그릇을 빼앗는 세습고용까지 빈번해지면서 기존 거대 노조에 대해 청년층은 더 외면하게 된 거죠.
실제 고용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 2021년 전국 노조 조합원 수는 12만8천명 늘었지만 조직률은 14.2%로 전년과 같았는데요.
노조에 가입한 근로자 수가 늘어났는데도 노조조직률이 그대로인 것은 산업현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MZ세대가 기존 노조를 외면하면서 생긴 현상이었습니다.
● 파업이 아니라면?…MZ노조가 외치는 가치들
지난해 12월, 지하철 파업을 예고했던 서울교통공사 노조는 총파업 돌입 하루 만인 1일 새벽 임금·단체협약에 합의하고 파업을 철회했습니다.
그 배경에도 MZ노조가 있었습니다. 서울교통공사 노조는 3개가 있는데요. 이 중 민주노총 소속의제1노조가 아닌 제2노조인 서울교통공사통합노조(한국노총 산하)와 제3노조인 서울교통공사올바른노조의 젊은 직원들이 파업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하루 만에 막을 내리게 된 겁니다.
MZ노조는 여기서도 실리를 외쳤습니다. 직원들에게 도움되지도 않고 시민들에게 불편만 끼치는 명분없는 파업이라는 겁니다.
MZ노조가 원하는 것은 당장 피부에 와닿는 것들이었습니다. 유연한 근무시간, 복지 확대, 연차가 쌓일수록 월급이 많아지는 '낡은 임금체계' 개선과 같은 것들이죠.
최근 신세계백화점에 창립 60여년만에 처음으로 노동조합이 생긴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요.
노조 설립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직원은 입사 12년 차 이하의 대리·과장급 직원인 파트너급으로 MZ세대가 주축이 됐는데, 그 시발점이 바로 '성과급 불만'이었다고 합니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지만, 보상이 부실하다는 내부 불만이 나왔고 MZ세대를 중심으로 노조를 만들어 대응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던 거죠.
인사제도 개선도 MZ노조의 관심사입니다. 최근 LG전자 사무직 노조는 '사람중심의 P.I.P 대항기'라는 제목의 만화를 인스타그램 공식 계정에 올렸는데, 이 만화의 내용은 부당한 인사제도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 '아직은 병아리' MZ노조, 이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MZ노조가 노동시장에 '찻잔 속 태풍'처럼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그 숫자도 적고, 세도 약합니다. 소수 대기업, 업종도 전자나 IT 분야에 국한돼 있죠.
주로 SNS등 온라인을 통해 만나고 소통하는데다, 조합원의 익명성까지 보장되다 보니 기존 노조들의 강점인 '단결력'은 MZ노조에겐 반대로 약점입니다.
더욱 문제는 이미 기존 현장직 노조가 교섭권을 가지고 있어 노조의 존재 이유인 교섭권 확보가 어렵다는 점이 한계죠. 2011년 복수 노조가 허용되면서 교섭 창구는 단일화하도록 돼 있어, MZ세대 노조처럼 뒤늦게 조직되고 조합원 수도 적다면 아무래도 불리하겠죠.
교섭권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현 노동법 체계에서는 사측과 임단협도 불가능하고, 교섭창구단일화절차에 참여해 소수노조로서 의견을 내는 수준에 그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MZ노조들은 뭉치기로 했습니다. 신생 노조로서 힘을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서울교통공사 '올바른 노조', LG전자 '사람중심 사무직 노조' 등 30대가 주축이 된 노조 8곳은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라는 신생 노조협의체를 만들었는데요. 오는 21일 발대식을 앞두고 있습니다.
현재는 LG전자·서울교통공사·금호타이어·한국가스공사·코레일네트워크 본사·LG에너지솔루션 등의 MZ노조 약 5천명이 뜻을 모았는데, 생활가전·렌털기업 SK매직 노조와 삼성그룹 계열 노조 등이 새로고침 협의회에 가입 의사를 전달하는 등 앞으로 그 세는 더 확장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당장 공동 투쟁에 나서기보다 연대해 협상력을 올리는 데 주력한다는 계획입니다.
우선 사무직 노조들의 최대 관심사인 '교섭단위 분리'나 '개별 교섭권'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고, 가입 노조의 법률적 분쟁이 발생할 경우 상호 자문과 원조 등을 통해 공동 대응하는 방식으로 힘을 키울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구호' 대신 '공정한 보상'을 내세워 MZ노조.
아직은 작은 외침이지만, 이들의 목소리가 모여 공감대를 이끌어낸다면, 단순한 반란이 아닌 양대노총의 기득권 행태도 변화시키는 성공적인 혁명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