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이태원 압사 참사' 발생 전 여러 건의 112 신고를 접수하고도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아 책임론이 불거지는 가운데 유사 사례에서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가 있어 주목된다.
2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당시 주심 조희대 대법관)는 2016년 '오원춘 사건' 피해자 A씨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오원춘은 2012년 4월 경기도 수원의 자기 집 앞을 지나던 A씨를 끌고 가 성폭행하려다 실패하자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했다.
당시 경찰은 피해자의 구조요청을 받고도 신고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늑장 출동한 사실이 알려져 책임 논란이 불거졌다.
유족은 "112신고를 했는데도 초동 수사가 미흡해 고귀한 생명을 잃게 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3억6천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심은 경찰의 위법행위로 A씨가 사망했다고 인정하고 9천982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반면 2심은 "국가가 피해자의 사망이라는 결과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볼 수는 없다"며 배상금을 2천130만원으로 줄였다.
당시 재판부는 "(경찰의 위법행위가 없었더라도) 오원춘의 난폭성과 잔인성 등을 고려하면 어떠한 돌발변수 발생 없이 피해자가 생존 상태에서 그대로 구출될 수 있었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면서 구조 기회가 박탈된 데 따른 배상 책임까지만 인정했다.
대법원은 그러나 국가의 배상 책임을 협소하게 인정한 2심 판단이 잘못됐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들이 112 신고 내용과 그 심각성을 제대로 전달받고 제때 수색·검거가 이뤄졌다면 피해자의 사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그러면서 112 신고센터가 출동 경찰관들에게 부실하게 지령을 전달하고 접수 요원을 제대로 감독하지 않는 등 경찰관 직무집행법상 의무를 위반해 피해자의 사망을 초래했다고 결론 내렸다.
서울고법은 대법원 판단을 수용해 정부가 유족에게 7천832만원을 배상하라고 다시 판결했다.
이러한 대법원 판결은 이태원 참사에서의 경찰 책임론을 둘러싼 법적 쟁점에서 하나의 시사점을 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경찰청이 1일 공개한 '이태원 사고 이전 112 신고 내역' 자료에 따르면 경찰은 참사가 벌어지기 약 4시간 전부터 압사 등 안전사고를 우려하는 11건의 긴급 신고를 받고도 손을 놓고 있었다.
경찰은 현장에서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은 채 상황을 종결하거나 아예 출동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비난 여론에 휩싸였다.
경찰이 신고 초기 신속하게 관리 인력을 보내 현장 통제에 들어갔다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법조계에서는 담당 지휘계통 경찰의 업무상 과실과 피해자들의 사망 사이 인과관계가 뚜렷이 입증되면 관련자의 형사 처벌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 역시 제기된다.
법무법인 찬종의 이병철 변호사는 "경찰관 직무집행법에 따라 경찰관은 생명·신체에 중대한 위해를 끼칠 위험한 사태가 있으면 위험 발생 방지 조치를 해야 한다"며 "이 같은 조치를 하지 않은 경우 업무상과실치사죄, 직무유기죄 등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