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를 점령했던 러시아군이 방사성 물질 노출에 대한 우크라이나 측의 경고를 무시한 채 작전을 수행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체르노빌 원전의 발레리 시묘노프 최고안전기술자는 8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러시아군 점령 기간에 가장 우려스러웠던 순간들을 증언하면서 "러시아는 하고 싶은 짓은 다 했다. 위험하다고 말렸는데도 무시했다"고 말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러시아의 한 화생방부대 병사는 체르노빌 원전의 폐기물 저장고에서 방사성 물질인 '코발트60'을 맨손으로 집어 들기도 했다. 코발트60은 미량으로도 다량의 방사능을 방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병사의 방사능 피폭량은 단 몇 초 만에 가이거 계수기의 측정 범위를 넘어설 정도였다고 시묘노프 최고안전기술자는 주장했다. 문제의 군인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군이 방사성 물질 노출 우려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른바 '붉은 숲'에 참호를 파고 주둔했다는 의혹도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NYT는 러시아군이 불도저와 탱크 등을 이용, 체르노빌 원전 인근에 참호를 설치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붉은 숲은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노출된 후 붉은색으로 고사한 소나무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토양에 방사성 물질이 다량 섞여 전세계에서 방사선 오염도가 가장 극심한 지역으로 꼽힌다.
NYT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이 지역에 단단한 참호와 벙커를 구축하고, 인근 나무를 태워 연료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이 지역의 방사능 오염도가 낮아지기는 했지만, 일부 지역은 오염도가 일반 자연의 수천 배에 달한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 활동한 군인은 1년 치 방사선량에 한꺼번에 피폭될 수 있다고 NYT는 전했다. 방사성 물질에 피폭된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는 경우 연기 등을 통해 피폭량이 증가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 당국의 허가를 받고 체르노빌 원전을 찾은 CNN은 러시아 점령군이 머물던 원전의 한 사무실 안에서 세계원자력협회(WNA) 규정치 이상의 방사선량이 검측됐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군이 붉은 숲 등 야외에서 묻혀 온 먼지가 방 안의 방사선 방출량을 높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CNN은 특히 이 지역에서 발견된 러시아군의 전투식량에서 자연 배출량의 50배에 달하는 방사선량이 측정됐다고도 보도했다.
게르만 갈루셴코 우크라이나 에너지장관은 러시아군의 행동에 대해 "정말 미친 짓이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러시아군은 체르노빌 발전소뿐 아니라 민가도 적극적으로 약탈했다고 NYT와 CNN 등은 전했다. 노트북 컴퓨터 등을 약탈해간 사례가 있었으며, 러시아군이 빼앗았다가 이송을 포기한 듯 도로변에 세탁기가 버려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한편 CNN은 러시아군의 점령 기간 어두운 벙커에서 감금됐던 체르노빌 경비병력이 전쟁포로가 돼 러시아로 이송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