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는 왜 돈 대신 '활명수'를 챙겼나 [이지효의 아이 '돈' 노우]

입력 2022-03-18 09:37
수정 2022-03-18 09:37


"조선시대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그 시절 풍속화를 보면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는데요.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에는 사람들이 밥을 먹는 장면이 더러 나옵니다. 잘 살펴보면 놀라운 부분이 있습니다. 밥 그릇이 엄청나게 크다는 거요. 요새로 따지면 거의 먹방을 찍는 수준입니다. 서양인들도 식사량에 놀랄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급체, 구토, 설사 등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온 게 '활명수' 입니다. 국내 최초의 의약품이라고 하니 꽤 오래됐죠. 일제강점기 때도 활명수는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그야말로 히트 상품이었다고 하는데요. 독립운동가도 돈 대신 이 '활명수'를 먼저 챙겼다고 합니다. 왜였을까요. 이번 <아이 '돈' 노우>에서는 '활명수'의 숨겨진 일화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 조선시대에 나온 '생명 살리는 물'



조선시대 성인 남자가 먹은 밥의 양은 7홉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1홉이면 180ml, 7홉이면 1,260ml나 되는 거죠. 서양인들도 그 식사량에 놀랄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프랑스인 신부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조선순교자비망록'에 조선인들의 먹성에 대해 꽤 자세하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많이 먹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며 질보다 양을 중시한다" "식사하는 동안 말을 하지 않아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조선시대부터 이런 말이 있었으니 예부터 전해오는 '사람은 밥심'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가 싶은데요. 하지만 너무 많이 먹다보니 급체, 구토, 설사 등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이 생기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고종 황제 당시 궁중 선관인이던 민병호는 이런 모습에 비책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선전관은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관 정도거든요. 임금을 측근에서 모시다 보니 궁중에서 사용되던 생약 비방을 어깨 너머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민병호는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서양 선교사로부터 서양 의학도 습득했고요. 민병호는 궁중에서 사용되던 생약 비방에 양약의 장점을 더해 죽어가는 민중을 살리기 위한 새로운 물약을 만들죠. 이게 바로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을 가진 '활명수'입니다. 그는 선전관을 사임하고 아들인 민강과 함께 동화약품을 차린 이후 활명수 팔기에 나섭니다.

●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된 '활명수'



활명수는 나오자마자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면서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합니다. 그 시절 활명수는 한 병에 50전. 50전이면 감이 안 오시죠.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을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고 합니다. 제법 비싼 가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많았죠. 그러자 아류 제품인 회생수, 소생수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죠. 동화약품은 그래서 '부채표 활명수'의 상표 등록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게 바로 국내 최초의 상표 등록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부채표가 없으면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문구도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그렇게 부채표는 활명수의 상징이 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활명수는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도 쓰였습니다. 당시 동화약방 설립자였던 민강은 독립운동가였거든요. 민강은 3.1 운동 직후 체계화된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임시정부와 비밀리에 연락하던 '서울연통부'를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활명수 판매 금액의 일부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하죠. 하지만 일제의 철저한 감시 때문에 이 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활명수를 만주로 아예 보내는 것이었죠. 만주 현지에서 직접 활명수를 팔아 임시정부 운영비로 사용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활명수는 만주에서도 아주 잘 팔렸고 독립운동가들 역시 활명수를 가지고 가 현지에서 팔면서 자금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 활명수가 '까스활명수'가 된 사연은?

우리에게 친숙한 건 아무래도 활명수 보다는 '까스활명수'일 겁니다. 까스활명수는 1967년 처음 나왔는데요. 말 그대로 기존 활명수에 가스, 그러니까 탄산을 채워서 만든 제품입니다. 이게 그냥 나왔냐, 아닙니다. 당시에는 콜라나 사이다 같은 청량감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이 청량감을 무기로 한 최대 라이벌이 등장한 거죠. 바로 삼성제약의 '까스명수'입니다. 까스명수는 소화제에 탄산가스를 넣어서 출시됐죠. 처음에는 까스명수를 무시했지만 급기야 활명수를 판매량을 제치기에 이르자 따라서 탄산을 넣기로 결정합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활명수'의 브랜드 파워 덕분인지 까스활명수는 출시 2년 만에 '까스명수'에 내줬던 1위 자리를 다시 찾아오게 됩니다.

"100년이 넘도록 국민 소화제로 자리를 굳힌 '활명수'의 비결은 뭘까. 전문가들은 부작용이 거의 없고 복용하기 편하면서 효능도 높다는 점을 국민으로부터 검증받은 점을 꼽고 있는데요. 그 옛날부터 '생명을 살리는 물'로 큰 인기를 끌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겠죠. 오죽하면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으로 건너갈 때 돈 대신 활명수를 들고 가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을까요. 중국 현지에서도 활명수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더 비싸게 팔렸다고 합니다. 2022년 지금에서 돌아봐도 활명수가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이름처럼 참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린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지금까지 <아이 '돈' 노우> 이지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