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러시아의 갈등이 갈수록 첨예해지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자국 내에서 활동하던 미국의 대표적 빅 테크 기업에 거액의 과징금을 물려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구글, 메타(페이스북 모회사), 트위터 등이 러시아에서 '불법 콘텐츠'를 삭제하지 않았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지만, 러시아의 대표적인 야권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 관련 게시글을 틀어막겠다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러시아에서는 현재 수감 중인 나발니 관련 게시물을 '극단주의'로 낙인찍고 '불법 콘텐츠'로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최근 모스크바 법원은 구글이 '불법 콘텐츠' 삭제 지시를 반복해서 어겼다며 구글에 과징금 72억 루블(약 1천164억원)을 메타에 19억9천만 루블(약 322억원)을 부과했다. 이번 주 초에는 트위터에도 300만 루블(약 4천800만원)을 부과한 바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24일(현지시간) 이런 내용을 보도하면서 "러시아가 자국 내에서 영업하는 해외 빅 테크 기업에 얼마나 자국 규정 준수를 압박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고 전했다.
실제 러시아에서 총선이 진행되던 지난 9월 러시아의 애플 앱스토어·구글 플레이 플랫폼에서는 야권 나발니 진영의 선거운동 앱인 '스마트 보팅' 앱이 삭제된 바 있다.
이 앱은 나발니가 여당인 '통합러시아당' 후보를 보이콧하고, 대신 경쟁력 있는 야당 후보(주로 공산당 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워싱턴 포스트에 "구글이 러시아 당국의 직접적인 위협을 당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이런 시도에도 유튜브에는 나발니가 제작한 동영상이 여전히 남아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불법 비자금으로 대규모 저택을 지었다는 고발성 동영상이다.
구글에 대한 거액의 과징금은 이런 상황이 주요 원인이 됐을 거라는 분석이 중론이다.
'모스크바의 메아리' 라디오의 인기 저널리스트인 알렉산데르 플루셰프는 텔레그램 채널에서 "이번 구글 관련 판결은 러시아에서 서방 인터넷 서비스 기업들을 몰아내겠다는 정치적 결정이 내려졌다는 의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미국의 빅 테크 기업을 아예 퇴출하고 통제가 쉬운 자국 내 자체 인터넷망 구축을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이 '자주적 인터넷'을 개발하겠다는 구상을 밝히기도 했다. 시민의 접속 콘텐츠를 정부가 쉽게 통제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망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러시아는 당국의 인터넷 통제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왔다.
'불법 콘텐츠' 삭제 거부를 이유로 트위터의 접속 속도를 제한했고, 개인의 인터넷 활동을 숨길 수 있는 가상사설망(VPN) 프로그램은 모두 퇴출해버렸다.
러시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메신저 앱 '텔레그램'도 현재는 이용이 가능하지만, 이용자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년간 사용이 제한됐었다.
지난 23일 연례 기자회견에서 푸틴 대통령은 "글로벌 네트워크 플랫폼이 러시아 법에 따라 함께 업무를 할 수 있도록 고집하겠다"고 말했다. 특히 특정 인터넷 회사를 차단하거나 속도를 제한하는 방식에 의존하지만은 않겠다고도 했다.
안톤 고렐킨 러시아 연방하원 정보정책위원회 부의장은 텔레그램 채널에서 "매출 연동 과징금으로도 구글의 행동이 (당국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매우 불쾌한 조치가 뒤따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