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북한)에서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는데…"
중국 랴오닝성에서 식당을 하는 한 중국인은 최근 중국판 틱톡인 더우인(音)에 갑작스러운 정전 탓에 촛불을 켜 놓고 장사를 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올리며 이렇게 한탄했다.
9월 중순부터 갑자기 중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이례적인 전력 대란이 하반기 중국 경제 안정을 위협하는 복병으로 부상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전력 대란 사태가 중국의 성장 동력을 약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 공급망에 충격을 안기는 한편 세계적 스태그플레이션(불황 속 물가상승)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 중국 GDP 66% 지역서 전력난…"올해 8%대 성장 어려워져"
발전용 석탄 공급 부족과 중국 당국의 경직된 탄소 배출 저감 정책 집행의 여파 속에서 9월 중순부터 광둥성, 저장성, 장쑤성,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 등 최소 중국의 20개 성(省)급 행정구역에서 산업용 전기를 중심으로 제한 송전이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제철·제련 등 에너지 소비가 특히 많은 일부 산업을 대상으로 제한 송전이 이뤄졌지만 중국의 '국경절' 연휴 시작 직전인 9월 말에는 제한 송전이 섬유, 제지, 식품, 전자 등 거의 모든 산업으로 확대되면서 '전기 배급'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많은 공장이 아예 가동을 멈추거나 전기가 들어오는 심야 시간에 맞춰 노동자들을 배치해 작업하는 일도 빈번하다.
대부분 지역이 산업용 전기 위주로 공급 제한을 가하고 있어 대도시 주민들은 아직 전력 공급 사태의 심각성을 체감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지난달 23일 랴오닝성의 성도(省都)인 선양(瀋陽)시에서 대규모 블랙아웃(blackout·대정전) 사태가 발생하는 등 전력 사정이 특히 나쁜 동북 지역에서는 일반 전기 공급 제한도 종종 발생하면서 양초 사재기 현상이 나타나는 등 주민들의 불안감도 커졌다.
전기가 없어 공장을 돌리지 못하거나 제한 생산을 해야 하는 기업들은 그야말로 비상사태를 맞았다.
모토로라에 스마트워치를 공급하는 전자 업체를 운영하는 왕(王)모씨는 제일재경(第一財經)과 인터뷰에서 "전기 공급 제한으로 이미 30% 감산 중"이라며 "계속 이런 상황이라면 50% 또는 그 이상의 감산을 해야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산업용 전기 공급 제한이 이뤄지고 있는 20개 지역의 국내총생산(GDP)은 중국 전체의 66%에 달한다.
특히 경제가 발전한 동남부 연안의 광둥성·저장성·장쑤성 3개 성만 합쳐도 중국 전체 경제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다.
중국의 광범위한 산업 현장에서 이처럼 혼란이 발생하면서 중국 경제의 하방 압력이 급속히 커졌다.
안 그래도 하반기에 접어들어 세계적 원자재 가격 급등, 중국 내 코로나19 산발 확산, 반도체 품귀, 헝다(恒大) 유동성 위기 등 요인이 겹쳐지면서 중국 경제의 회복 동력이 뚜렷하게 약해지고 있었는데 전력 대란 사태라는 대형 악재까지 더해진 상황이다.
세계 주요 투자은행(IB)들은 최근 중국의 경제 성장 눈높이를 낮추고 있다.
골드만삭스 올해 중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8.2%에서 7.8%로 하향 조정했고, 일본 노무라증권도 8.2%이던 기존 전망을 7.7%로 수정했다.
7%대 성장률은 여전히 세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절대적으로 높은 수준이기는 하다.
하지만 중국의 2020년 경제성장률은 코로나19 충격의 여파로 44년 만의 최저치인 2.2%를 기록했기에 올해 7%가량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해야 비로소 작년과 올해에 걸쳐 평균적으로 예년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회복하게 된다.
최근 발표된 주요 경제 지표도 대체로 중국 경제의 성장 동력이 크게 훼손되어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9월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경기 확장과 위축을 가르는 기준인 50 밑으로 떨어져 49.6을 기록, 코로나19 사태가 가장 심각했던 작년 2월 이후 19개월 만에 최악의 수준을 나타냈는데 9월부터 본격화한 전력 대란이 직적접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또 8월 중국의 산업생산 증가율은 5.3%로 작년 7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나타내는 등 경제 회복 동력이 코로나19의 충격이 한창이던 작년 수준으로 약해지는 모습이다.
◇ 중국 전력 대란 '강 건너 불' 아냐…"한국도 민감 영향"
전문가들은 중국의 전력 대란 사태로 인한 혼란이 중국을 넘어 한국을 포함한 세계로 급속히 전이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이 세계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매우 특별하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8일 기사에서 "중국의 에너지 위기가 아이폰에서부터 우유에 이르는 모든 것을 강타하고 있다"며 "중국의 에너지 경색 사태로 인한 충격은 도요타 자동차, 호주의 양 사육 농가, 포장용 골판지 상자 제조업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도 대표적으로 중국의 전력 대란 사태가 초래한 공급망 혼란의 영향권에 우선 들 수 있는 나라로 손꼽힌다.
블룸버그 통신은 "대만과 한국과 같은 (중국과 교역이 많은) 이웃들은 민감하다"며 "호주나 칠레와 같은 금속 수출국들과 독일 같은 핵심 무역 상대도 특히 중국 경제의 약화에 따른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전력대란 사태에 따른 피해는 특정 업종을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장쑤성에 있는 아이폰 조립 업체 허숴(和碩·PEGATRON)는 전기 사용량을 10% 이상 줄여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업계에서는 가뜩이나 심각한 신제품 아이폰13의 생산에 차질이 어질 수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거미줄처럼 복잡한 산업사슬로 엮인 반도체·전자 업계 공급망 운영에도 차질이 생기면서 그 여파가 애플, 테슬라, 마이크로소프트, HP, 델과 같은 미국의 전자·자동차 업체들을 넘어 퀄컴과 인텔 등 반도체 업체에까지 미칠 수 있는 전망도 나왔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제일재경에 "이번 전력 공급 제한이 중국의 반도체 공급망에 끼친 영향이 큰데 특히 장쑤성과 광둥성 일대의 관련 기업들이 받은 충격이 가장 심각하다"며 "기판, 전자소재, 발광다이오드(LED)과 같은 상품 공급이 일단 중단되면 전체 공급망에 거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의 반도체 후공정 업체인 르웨광(日月光·ASE)은 지난달 27일부터 30일까지 나흘간 장쑤성 쿤산(昆山)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르웨광은 퀄컴, 애플, 엔비디아 등에서 반도체를 받아 최종 제품으로 만드는 패키징 및 테스트 등 후공정 처리를 맡는 기업이어서 이곳에서 병목 현상이 생기면 최종 수요자들에게 반도체 제품이 제때 공급되지 못하는 병목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중국의 전력 공급 사태가 초래한 공급망 충격이 기존의 원자재 가격 급등, 반도체 품귀, 해운·항공 등 물류비용 급등 현상과 맞물리면서 세계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을 자극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판테온 매크로 이코노믹스 소속 경제학자 크레이그 보텀은 블룸버그 통신에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제조업 분야의 스태그플레이션 충격으로 보인다"면서 "중국이 전 세계 공급망에 깊게 연관돼있는 만큼 가격 상승은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봤다.
결국 사태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중국이 얼마나 빨리 전력 대란 사태를 극복하느냐에 달렸다.
전력 대란이 일차적으로 중국의 평소 전력 약 70%를 책임지는 석탄 수급 문제에서 비롯된 가운데 중국 당국은 최근 전력 부족 사태가 민심 불안으로까지 번지자 산시(山西), 네이멍구(內蒙古) 등 자국 내 탄광에 대대적인 증산을 명령하고 외국에서 석탄 수입을 최대한 늘리는 등 여러 비상 대책에 나섰다.
일각에서는 9월 중순부터 봇물 터지듯 나타난 지방정부의 갑작스러운 산업용 전력 공급 제한이 단순한 석탄 부족 때문만이 아니라 중앙정부의 3분기 실적 점검을 앞두고 나타난 '밀린 숙제하기' 성격도 강해 4분기가 시작된 10월부터는 사정이 급속히 개선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경제 매체 차이신(財新)은 "표면적으로 전력난의 '원흉'은 석탄 부족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전력난의 직접적 원인은 '에너지 소비 이중 통제'"라고 꼬집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