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립 이래 첫 '반바지 회의' 주재한 서경배 회장
지난 달 19일 오전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사옥 11층에 있는 임원진 회의실에 진풍경이 연출됐다.
평소 캐주얼 복장을 즐겨입는 서경배 회장이 이날 한 발 더 나아가 반바지를 입고 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임원진들 역시 입사 이래 처음으로 반바지 차림으로 서 회장과 회의를 했다.
복장 규정이 자유로운 회사 내에서도 서 회장과 임원진들의 '반바지 회의'는 다소 파격적인 행보였다.
아모레퍼시픽은 3년 전부터 사회적 통념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직원들이 최대한 자유로운 복장으로 출근할 수 있도록 독려해 오고 있다.
▶ 서경배 회장, 반바지에 '경영 메세지' 담다
트렌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회사 특성을 고려할 때, 복장제한을 두는 건 직원들이 미(美)적 감각을 키우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서 회장의 경영 철학이 반영된 사내 정책이다.
'멋:있게 입자(Dress with Mot)'라는 구호 아래 시작된 자율 복장 문화는 그 사이 사내에 확고하게 정착됐다.
반바지를 입거나 샌들을 신고 출근한 남성 직원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회사에 더 이상 없다.
서 회장도 평소 노타이는 물론 재킷과 면바지에 흰 운동화를 매칭한 편안한 복장을 즐겨 입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 회장의 '유러피언 룩'은 패션에 민감한 직원들 사이에서도 늘 화제다.
한 회사 관계자는 "직원들의 반바지 패션은 이제 익숙한데, 회장님이 반바지를 직접 입으실 줄은 몰랐다"며 "직원들도 회사 일에 있어 더 과감해지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 '中 사드·코로나 팬데믹' 정면 돌파 의지 담아
국내 화장품 업계 대부분 그렇듯, 아모레퍼시픽은 중국 사드 사태와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언택트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존 마케팅 전략과 오프라인 매장과 면세점 중심 유통 구조는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확고한 신념과 취향에 기반한 '가치소비'를 중시하는 MZ세대가 화장품 시장의 새로운 '큰 손'으로 떠올랐다.
서 회장의 자율 복장 지침은 MZ세대의 트렌드를 빠르게 파악해 시장을 선점하고자 하는 아모레퍼시픽의 새로운 비전과 무관하지 않았다.
▶ MZ세대 공들이는 아모레퍼시픽
회사는 일찍이 지난 2017년 용산 신사옥 이전 이후부터 MZ세대를 겨냥한 '니치마켓(틈새시장)' 공략을 회사의 차세대 성장 전략으로 낙점하고, 사내벤처 육성 프로그램인 '린 스타트업'을 통해 다양한 니치 브랜드를 잇따라 런칭했다.
'그루밍족' 증가 추세를 발판 삼아 키운 남성 뷰티 브랜드 '브로앤팁스', 남성 메이크업 전문 브랜드 '비레디', 2030 비건족을 겨냥한 비건 브랜드 '이너프 프로젝트', 이너 뷰티 브랜드 '큐브미' 등이 대표적이다.
회사의 니치 브랜드 육성 전략은 이미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2018년 출범한 큐브미는 1년 만에 각종 e커머스와 백화점, 드럭스토어 등 온·오프라인 700여개 매장으로 판매처를 확대하며 가파르게 성장했다.
Z세대 남성을 겨냥해 2019년 9월 런칭한 비레디는 지난해 평균 매출이 전년 대비 79% 성장했고, 연간 매출 목표도 브랜드 출범 한 달 만에 달성했다.
올 들어 회사는 MZ 소비자 공략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나섰다.
산업군을 넘나드는 다양한 브랜드들과의 이색 협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올해 1월 아모레퍼시픽은 'MZ세대의 샤넬'로 통하는 패션 브랜드 오프화이트와 협업해 제작한 한정판 제품 '프로텍션 박스'를 선보였다.
아모레퍼시픽의 뷰티 아이템(시트 마스크, 톤업 쿠션, 립밤)과 오프화이트의 패션 아이템(패션 마스크, 마스크 스트랩, 프로텍션 컨테이너)으로 구성된 제품으로 출신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오프화이트가 한국 기업과 진행하는 첫 번째 콜라보였기 때문이다.
또, 2월엔 '한율'이 모바일 농장 게임 '레알팜'과 콜라보 게임을 런칭하며 브랜드 인기제품인 달빛유자 라인의 스토리를 게임에 담아냈다.
회사는 이어 5월 삼성전자와 협업해 '갤럭시 버즈 프로 위드 라네즈 네오 쿠션 콜라보라해' 스페셜 패키지를 출시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오랜 인식이 변하고, 굳게 자리잡았던 패러다임이 바뀌는 데까진 무수한 시간이 걸린다.
그나마 누군가가 용감한 '첫 발'을 내딛지 않는다면 변화는 없다.
한 회사 임원의 반바지 출근이 자연스러운 일로 인식될 때까지 앞으로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앞서 2008년 아모레퍼시픽은 '쿠션'을 개발했다.
아모레표 쿠션은 국내를 넘어 전세계 뷰티 업계의 메이크업 패러다임 전환에 성공했다.
통념을 깬 다양한 시도들을 감행하는 게 생존전략이 된 시대.
단순 임직원들의 복장 자율화를 격려하는 차원에서였다면, 서 회장이 반바지 회의를 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서 회장이 '이렇게까지' 한 건, 쿠션을 잇는 '강력한 한 방'을 기다리고 있다는 상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을 공산이 크다.
이제 직원들이 과감한 '첫 발'을 내딛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