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잊은 대통령에게 미래는 없다 [기자수첩]

입력 2021-06-26 09:05
수정 2021-06-26 21:47


지난해까지는 '원상회복'이라는 단어로 집값을 잡겠다는 기개라도 보여줬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없었다.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누구나 아는 엄청난 유동성과 세대수 증가 문제를 '천재지변'처럼 말하더니, 그저 송구하다는 말뿐이었다. 이것이 과연 '사과'였나?

최근 경실련이 서울 아파트 11만5천 세대를 조사했더니, 4년 간 무려 93%가 올랐다고 한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대통령이 원상회복을 외친 지난해 1월 이후에도 27%가 더 올랐다는 것이다.

올해 들어 집값 잡겠다는 말이 싹 사라졌다. 이제 대통령도 여당도 국토부도 집값 얘기는 하지 않는다. 그저 다음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도 입주를 장담할 수 없는 '공급'이란 신기루 같은 단어만 외치고 있다.

마음 다잡고 시작한 '공급'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 '사전청약'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판타지'로 정책의 실패를 덮을 수는 없다. 게다가 서울 주변을 싹 다 파헤치겠다는 3기 신도시가 약속대로 공급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벌써부터 여기저기 잡음이 들린다.

억울할 수도 있다. 엄청난 유동성이 만든 자산 가격 버블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부동산 정책 프레임 때문에 정부가 잘한 것도 다 묻힌다는 불평도 이해가 간다. 또 문재인 정부 정책에 대한 언론의 평가가 야박한 것도 사실이다. 왜 이 지경인가?

25번의 대책이 나오는 동안 우리 모두는 투기꾼으로 내몰렸다. 집 한 채 더 사서 노후를 준비하던 부모님도, 허름한 전셋집 살면서 재건축 딱지 하나만 바라보는 형·누나도, 더 늦기 전에 새 아파트 살아보려 기회만 보는 고모·이모도, 역세권 아파트를 향해 2년마다 이사를 하는 우리도 '투기꾼'으로 불렸다.

국민들을 몰아세우고는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없이 그나마 잘한 것들을 알아주길 바랐다. 부동산에서 시작된 불신은 문재인 정부 정책 전반에 대한 신뢰를 깨버렸다. 부동산 정책의 상징이었던 김현미 전 국토부 장관은 뒤로는 '영끌'해서 집을 사더니 이제 수사까지 받을 처지가 됐다. 이러니 무엇을 믿겠는가.

좋은 경제학자들에게 듣고 훌륭한 장관을 쓰지 않은 건 온전히 대통령의 책임이다. 공무원들 질책할 필요도 없다. 제대로 된 철학이 없었으니 닥치는 대로 대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잡을 시간은 충분했다. 엄청난 유동성의 힘을 막기는 버거웠겠지만, 누더기 대책으로 시장의 메커니즘을 망가트리지는 않을 수 있었다.

무려 25번의 부동산 대책을 내놓는 동안, 3기 신도시 중 하나를 공공임대 아파트로 덮어버리겠다는 결기라도 보여주지 못했다면, 이제 와서 국정철학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비싼 집 가진 사람이 세금 더 내는 건 그래도 명분이라도 있으니, 부동산 세제를 비판하는 건 '억까'일수도 있겠다. 백번 양보해 이 부분은 사과하지 않으셔도 좋다.

건방지다 노여워하지 마시라. 올라간 집값은 둘째 치고, 덕지덕지 만든 부동산 관련 법과 제도는 앞으로 우리 국민들의 삶을 불행하고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25차례 덧칠을 한 졸작이라도 그것이 나라의 법과 제도라면, 그것을 바로 잡는 데도 적지 않은 세월이 걸린다. 대통령은 떠나도 우리 국민들이 감내해야 할 일이다.

슬그머니 태세 전환하지 마시고 먼저 조목조목 잘못을 따져 국민들에게 사과하시기 바란다. 억울한 것도 안다. 사과한다고 집값이 떨어질 것도 아닌데 지금 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도 그렇게라도 새까맣게 속이 타들어간 국민들 한풀이는 해주셔야 하지 않겠나. 그게 대통령 되시기 전에 말씀하시던 지도자의 자세 아니었나.

그래야 넓은 땅에 멋지게 지은 새 집에서 노후를 보내실 때, 인사드리러 찾아온 국민들 볼 낯이 있지 않겠는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집값에 고통스러운 국민에 대한 예의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