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마주한 딜레마 '규제' [이슈플러스]

입력 2021-06-15 17:38
수정 2021-06-15 17:38
[문재인 대통령 (제1차 한국판 뉴딜 전략회의, 지난해 9월) : 불필요한 규제를 조속히 발굴해 개혁해 나가겠습니다 특히 뉴딜 분야 프로젝트나 기업 활동을 제약하는 규제는 과감히 혁파해 나가겠습니다.]

<앵커>

문재인 대통령은 기업들이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기업 활동에 방해되는 각종 규제들을 없애겠다고 거듭 강조해 왔는데요.

과연 기업들은 대통령의 이 같은 약속이 잘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오늘 이슈플러스 시간에는 산업 현장에 뿌리 깊이 자리 잡은 '손톱 밑 규제'에 대해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산업부 송민화 기자 나왔습니다. 송 기자.

<앵커>

정부에서는 기업이 일하기 어려운 각종 규제를 풀어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업계 실상은 어떤지 먼저 좀 짚어주시죠?

<기자>

네, 기존에 있던 규제를 완화한다는 것은 다양한 검증이 필요하고 또 관계부처 여럿이 얽혀있는 경우가 많다 보니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규제를 풀어주는 '규제 샌드박스'와 같은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죠.

전기차용 폐배터리를 처리하는 A 업체의 경우에는 이런 정책으로 혜택을 보는 기업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업체는 폐배터리를 받아서 캠핑용 파워배터리를 재활용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 동안은 폐배터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전기차는 정부 보조금을 받기 때문에 폐배터리는 지자체에 반납하도록 돼있었거든요. 그런데 규제 샌드박스 적용 이후 지자체로부터 폐배터리를 수거하는 게 수월해진 상태고요. 이로 인해서 사업의 제약은 다소 해소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례는 그리 흔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대기업으로 갈수록 규제가 발목을 잡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오히려 대기업이 규제로부터 자유로울 것 같은데 그게 아닌가 봅니다. 이 부분도 자세히 짚어 주시죠?

<기자>

아무래도 대기업의 경우는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도 크고 새롭게 추진되는 사업도 많다 보니까 예상치 못한 제약도 많이 따르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인 SK하이닉스도 이런 경우에 해당했는데요. SK하이닉스는 본사가 경기도 이천에 있다 보니 수도권 정비계획법에 따라서 공장 증설이나 협력업체가 이 지역으로 입주하는데 제약이 따르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수도권정비 계획법이 뭐냐하면요. 서울이나 인천, 경기도와 같은 수도권에 인구나 산업이 과도하게 집중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인데요.

이 법에 따라서 수도권 내에 인구집중 유발시설이나 공업지역이 들어오는 게 일단 제한되고 있습니다. 만약 허가를 받으려면 수도권 정비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서 국토해양부 장관까지 승인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에 허가를 받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고요.

결국, SK하이닉스도 이에 따른 규제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앵커>

굉장히 광범위하게 엮이다 보니까 규제를 풀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군요? 이것 말고도 이번에는 규제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는 업체들도 있다고요?

<기자>

네 그렇습니다. 국내 정유사들의 이야기인데요.

잘 아시다시피 SK이노베이션이나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에쓰오일과 같은 정유 업체들은 ESG 경영이 강화되면서 수소를 생산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 수소를 만들기 위해서 액화천연가스, LNG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산업용이 아닌 발전용 세율에 관한 기준이 없다 보니까 세 배 이상 비싼 산업용 세금을 물면서 LNG를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거든요. 정유 업계는 수소 경제 조기 정착을 위해서라도 수소 생산용 천연가스 세율을 낮춰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밖에도 한화케미칼의 경우에는 폐플라스틱에서 오일을 추출해 나프타를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중인데요. 하지만 기술 개발에 성공해도 현행법상 추출한 오일을 원료로 사용할 수 있는 지침이 없다 보니까 현업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도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앵커>

사례를 살펴보니까 기업 환경 변화 속도에 비해서 정부의 규제 완화 속도가 느리게 대응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기자>

특히 요즘에는 ESG 경영을 강조하면서 국내 기업의 친환경 사업 진출이 늘어나고 있는데요. 규제에 막혀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국내 기업 10곳 중 네 곳은 친환경 신사업을 추진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내 기업은 친환경 신사업 추진 과정에서 각종 규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친환경 신사업 추진 과정에서 기업이 필요하다고 느낀 정부규제완화 정책으로는 세제·금융 지원(42%)을 가장 많이 꼽았고요. 이어서 법과 제도의 합리화(39%), 다음으로 정부 연구·개발 확대(18%) 순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업규제 강화가 회사경영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부분 기업이 가장 먼저 국내고용이 축소(37.3%)될 것이고 이는 국내투자 축소(27.2%)로 이어진 다음, 결국 국내사업장을 해외로 이전(21.8%)하는 것과 같은 현실적인 답을 찾을 것이라고 답하면서 규제 완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특히, 이미 사라졌어야 할 기존의 규제가 여전히 남아있어서 오는 어려움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규제일몰제라고 해서 정부에서는 일정 기간 시행 후에 자동적으로 폐지하거나 성과를 분석한 후에 규제를 연장하는 경우로 나눠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식적으로 운영된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보다 근본적인 개선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와 관련한 인터뷰 들어보겠습니다.

[유정주 / 한경연 기업혁신팀장 : 정부도 사실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제 사업 현장이나 국민이 느끼는 규제 개혁에 대한 만족도나 체감도는 그렇게 좋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규제 개혁 체감도를 확실하게 올리기 위해서는 해외에서 하고 있는 일몰제, 특히 효력상실형 일몰제를 일반화하는 원칙을 수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관련한 자료나 회의록 이런 것들을 확실하게 공개해야 합니다.]

바로 재검토형 규제일몰제의 운영이 형식적이라는 분석인데요. 자료를 살펴보면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재검토형 일몰 규제를 심사한 결과 모두 9,200여 건 가운데 266건이 폐지됐습니다. 비율로 따져보면 2.9%만 폐지된 겁니다. 일몰대상 규제는 부처에서 자체평가를 거쳐서 폐기할지 여부를 심사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현재 방식은 실질적인 영향 평가 없이 단순 재연장에 그치고 있어서 형식적이라거나 부실 심사 아니냐는 지적까지도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결국 규제들이 계속 생겨나는 상황에 기존의 규제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보니 기업이 일하기 힘든 상황은 계속 되고 있다는 겁니다.

특히, 종합 반도체 강국으로 우뚝 서겠다며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한 이른바 정부의 'K-반도체 육성책'에 대해서도 아쉽다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미래가 걸린 핵심 산업이고 먹거리 산업이라 치켜세우면서도 정부의 직접 투자는 미비하고 규제 완화도 기대에 못미친다는 분위기가 팽배한데요. 이 내용은 임원식 기자의 리포트로 짚어보겠습니다.

<임원식 기자>

앞으로 10년 동안 510조 원 넘는 돈이 투입되는 'K-반도체 벨트' 프로젝트.

각종 세액공제 확대에, 금융·인프라 지원과 인력 양성까지 패키지로 지원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종합 반도체 강국 건설하겠다는 게 정부의 구상입니다.

정부 스스로 파격적인 수준이라 표현한 대규모 프로젝트지만 산업 현장에선 기대보다 우려가 더 큽니다.

당장 반도체 공장 하나 짓는데 지켜야 할 규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보니 사업이 원활하게 진행되겠냐는 겁니다.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물 공급부터 송전망 구축이나 지하화에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었던 이전 사례들에 비춰보면 공장 하나 짓는 데 몇 년이 걸릴 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만 TSMC의 반도체 공장 건설에 필요한 도로와 물 공급에 미국 피닉스시가 2,230억 원을 지원해 준 사례나 삼성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겠다며 세금 감면과 인프라 지원 등 파격적인 조건으로 구애하는 미국 텍사스와 애리조나, 뉴욕 주의 상황에서 보듯 매우 대조적입니다.

[박재근 / 한양대 교수·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 : "(미국에선) 2년에서 2년 6개월이면 공장을 설립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평택(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 전기가 들어오는데 4년이 걸렸습니다. 공장을 짓는 데 있어서 폐수처리안 규정, 산업단지 입지법, 수도권 정비계획법 여러가지가 얽혀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을 간소화하고 완화하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공장을 짓고 나서도 규제에 대한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특히 많이 벌어봐야 일 년에 1, 2억 원 남짓 남는다는 중소기업들의 걱정이 태산입니다.

사고로 직원이 사망했을 때 회사와 사업주에게 중형이 내려지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대표적인 예로, 너무 가혹하다는 목소리입니다.

반도체 제조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지 않은 '주 52시간 근무'나 미국 허용치의 100분의 1 수준인 '화학물질 반입 제한'에도 불만이 가득합니다.

[중소 반도체기업 관계자 : 개발기간이 길고 투자도 대규모로 가야 되는 데다 특히 중소기업이라 인력난에 많이 시달리고 있거든요. 한정된 자원(인력)으로 운영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소부장 기업은 특별히 (규제를) 예외로 해 줬으면...]

여기에 세액공제 혜택 또한 당초 기업들이 기대한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데다 유럽이나 일본, 대만 등 다른 나라들과 달리 보조금 지급을 포함한 정부의 직접 투자가 거의 없다는 지적까지 나오면서 'K-프로젝트'가 생색내기용 아니냐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경제TV 임원식입니다.

<앵커>

규제 완화를 둘러싼 기업의 애로사항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닐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해외에서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기자>

호주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주는 경제협력개발기구인 OECD로부터 규제 사후 영향 평가 분야에서 모범 국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일단 호주에서는 모든 규제는 발효일로부터 10년이 경과하면 자동적으로 규제를 폐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동일하거나 유사한 내용의 규제가 계속 필요한 경우가 있다고 하면 규제 신설과 같은 재입법 절차를 거쳐서 기존에 있던 규제를 대체해야합니다. 의회에서 정부 규제를 승인하지 않으면 즉시 효력을 상실하게 되고요. 6개월 이내 동일 내용의 규제는 재입법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사항들을 종합해볼 때 우리나라도 보다 포괄적인 규제 영향 평가가 필요하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즉, 국민과 기업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과하는 규제는 입법주체나 법안의 종류와 무관하게 규제가 미칠 영향을 충분히 검토한 후에 신설되거나 강화돼야 규제의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뜻입니다.

<앵커>

네, 알겠습니다. 오늘 내용은 여기까지 살펴보겠습니다. 산업부 송민화 기자였습니다.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