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가 돼서 떠나는 것인 만큼 기분은 굉장히 담담해요. 시원할 것도 없고 섭섭할 것도 없습니다. (냄비 속) 개구리론도 이야기 했었고 골든타임의 기회의 창이 닫혀가고 있다, 지금 빨리 변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는 절박한 마음을 여러 번 표시한 걸 기억하실 겁니다. 이제 그 부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됐죠."
8년 가까이 우리 경제계를 대표해 온 박용만 회장이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지난 2013년 손경식 회장 후임으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은 박 회장은 다음 달 최태원 회장에게 바통을 넘기고 공식 퇴임한다.
그는 우리 경제가 대변혁기를 맞았던 지난 8년 동안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과 청년창업가들을 대변했고, 정책을 같이 만들 파트너를 찾았던 정부와는 적극적으로 소통했다. 그와 함께한 시간 동안 대한상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경제단체의 위상을 갖게 됐다.
떠나는 박용만 회장이 지난 18일 기자들과 마지막 퇴임 간담회를 가졌다. 박 회장은 후임자인 최태원 회장을 생각해 자신의 말을 줄이는 것이 도리라고 주저했지만, 담담하고 묵직하게 지난 시간들을 얘기했다.
"재임기간 7년 8개월 동안 가장 많이 절실하게 호소한 게 이제는 법과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기술과 사업들이 태동하고, 있는 사업들도 새롭게 융합해 바뀐 모습으로 태어나는 이 시대에는 도저히 그런 법과 제도로는 미래를 담을 수 없습니다."
○ 청년 창업가의 멘토…박용만과 '샌드박스'
떠나는 그는 마지막까지 법과 제도를 바꿔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샌드박스'는 그 당위성을 세상에 설명할 수 있는 실험실이었고, 그의 재임기간 가장 보람된 일 가운데 하나였다.
박 회장의 규제 개혁에 앞장선 것은 낡은 규제로 좌절하는 젊은 창업가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규제샌드박스는 탄생했다.
민간 주도로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샌드박스는 모래밭에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노는 것처럼 혁신 제품과 서비스의 시장 출시를 가로막는 규제를 없애주기 위한 젊은 기업가들의 울타리 역할을 했다.
문을 연지 1년도 안되는 시간에 발굴된 혁신 과제가 220여건이 넘고, 91개 사업에 기회의 문이 열렸다.
박 회장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는 조언이 이 시대에 맞은 조언일지 자신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청년창업가들이 도움을 청하면 퇴임 후에도 어떤 일이 됐든 몸을 사리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도와주겠다고 했다.
"기업들이 다 변화에 저항하는 볼멘소리라고 볼 게 아니라 그 조치에 저항하냐 수용하냐 이슈보다 더 앞서 우리나라 산업이 얼마나 건강하고 성장하고 고도화할 건 어떤 게 있는지 산업 전체에 대한 반성, 새로운 시각, 그에 맞춰서 환경을 바꿔주는 게 필요한 시기에요."
○ 규제혁신 전도사…"큰 흐름 못바꿔 아쉽다"
박 회장은 모든 규제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왜 기업들의 거부감이 큰 지, 걱정이 많은 지 그 이유를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경제의 커다란 전환점에 놓인 상당수 기업들이 규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건강하지 못하고 했다.
하지만 정부와 국회를 설득하기 위한 방법은 달라야 한다고 했다. 무작정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팩트(fact)와 논리를 가지고 설득하고 지지를 얻어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규제 3법'이 원안대로 통과되는 과정에서 박용만 회장과 상의가 택한 온건한 방식에 대해 뒷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박 회장은 조금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그 방법으로 가야 우리 사회의 대화와 논쟁이 성숙해진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규제개혁이 큰 물꼬를 바꾸지는 못해 아쉽다고 했다. 그는 규제를 안하는 것을 기본으로 법과 제도를 생각하고, 공무원이 과감하게 규제개혁에 나설 수 있도록 과도하게 책임을 묻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래 방향에 대해 나보다 훨씬 잘 대변하실 수 있는 식견을 가지고 있다고 봤고. 가지신 생각 중에 사회적 가치나 소위 말하는 그런 부분들이 전 세계에 잠깐 지나가는 조류가 아니라 시대를 관통해서 이제는 하나의 뚜렷한 요구사항으로 자리를 잡은 건데, 그런 면에서도 상당히 적절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 든든한 다음타자 최태원…"나도 추천했어"
박용만 회장은 간담회 내내 후임인 최태원 회장에 대한 기대감을 여러차례 드러냈다.
처음으로 4대 그룹 회장이 상의 회장이 된다는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영향력 그 자체를 넘어, 미래산업에 대한 최태원 회장의 식견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박 회장은 자신도 최태원 회장을 추천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털어놨다. 상의는 목소리를 내는 곳이니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는 것도 최 회장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계산을 한 걸 보니까 (언론인과) 218회를 만났고, 만난 시간이 231시간 55분이랍니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냈던 내 마음의 친구와 헤어지는 자리라고 할까? 그렇게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내 마음이 오늘 정말 그래요. 만감이 교차합니다."
○ 기자와 박용만…"친구와 헤어지는 자리"
흔히들 말하는 재벌 회장과 맥주 한잔을 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사실 대화라는 것 자체가 어렵다.
박 회장은 코로나19로 만남이 어려웠던 지난 해를 빼고는 매년 기자들과 호프타임을 즐겼다. 박 회장은 언론과 진심으로 소통했고, 생각이 다르면 설득하고 사실과 논리로 이해시켰다.
사실 취재를 하는 것보다 우리가 모르는 회장의 사적인 얘기를 듣는 게 더 재미있었을 수도 있다.
퇴임 후를 묻는 질문에 박 회장은 우선 자신이 맡고 있는 두산인프라코어 이사회 의장으로서 소임을 잘 마치겠다고 했다. 두산인프라코어 매각이 마무리된 후에 계획에 대해서는 '무계획'이라고 했다.
다시 두산그룹에서 일을 할 생각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무엇보다 '정치'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주고 젊은이들의 꿈을 도와줄 그런 일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