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역대 교황들 가운데 최초로 '동성 커플을 법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전세계 가톨릭 본산인 바티칸도 당혹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23일(현지시간)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21일 로마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된 다큐멘터리 '프란치스코'에서 이같이 밝혔다.
교황은 다큐멘터리 내 인터뷰에서 "동성애자들도 주님의 자녀들이며 하나의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갖고 있다"면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버려지거나 비참해져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은 시민결합법(Civil union law)이다. 이는 동성애자들이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이라며 "나는 이를 지지한다"고 부연했다.
교황은 2013년 즉위 이래 줄곧 '사람이 먼저'라는 인식 아래 동성애자들의 인권과 차별 금지를 강조해왔다.
하지만 이처럼 명료한 용어로 동성 커플의 법적 보호, 한발 더 나아가 시민결합법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즉위 이후 처음이다.
한 사제는 "근래 수십년 간 교황에게서 나온 발언 가운데 가장 폭발력이 크다"면서 "바티칸 성직자들도 하나같이 큰 충격을 받은 모습들"이라고 말했다.
진보·보수를 떠나 상당수 사제와 신자들은 교황의 발언이 1천년 넘게 유지된 기존의 가톨릭 교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입장이다.
가톨릭 교리는 결혼이란 남성과 여성이 결합해 부부의 연을 맺는 것으로, 성행위도 이러한 부부의 틀 안에서만 허락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시민결합법상의 커플도 법적으로는 부부와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는다. 하지만 교리상으로는 정식 부부가 아닌 동거 형태에 불과해 여기서 이뤄지는 모든 성행위는 간음으로 간주된다.
이런 맥락에서 시민결합법을 지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간음을 용인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가톨릭 교계에서 시민결합을 허용하지 않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실제 가톨릭교회의 신앙·윤리 문제를 다루는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2003년 훈시를 통해 "동성애자를 존중하되 이것이 동성 행위나 동성 결합에 대한 승인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이 보수적 교리 해석으로 유명한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2005∼2013년 재임)이었다.
교리상 이성 간의 시민결합도 금기시되고 있는데, 동성 간의 결합을 지지한다는 취지의 교황의 발언은 파격적일 수밖에 없다.
교황이 인터뷰 상에서 동성 커플의 '가족 구성'을 언급한 것도 성직자들을 당혹게 하는 부분이다. 교리상으로 가족은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만이 구성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황청 안팎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러한 발언이 어떤 맥락과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 주목하는 분위기다.
재임 기간 있었던 다양한 교리·사회적 이슈를 얘기하는 과정에서 나온 개인적인 의견으로 지나친 확대 해석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부터 이미 이탈리아를 비롯해 전 세계 많은 국가가 채택한 시민결합 이슈를 교계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논쟁할 시점에 이르렀다는 교황 나름의 치밀한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까지 다양하다.
가톨릭 교리도 시대 흐름에 발맞춰 가야 한다는 교황의 오랜 지론이 반영됐다는 시각도 있다.
다만, 현지 성직자들 사이에선 발언의 배경이 무엇이냐와 관계 없이 전 세계 교계 사회에서 시민결합을 둘러싼 치열한 찬반 논쟁이 이미 시작됐으며 이는 한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는 데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