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자금 풀었더니 다시 은행으로…예금만 109조 폭증

입력 2020-07-27 07:16
수정 2020-07-27 09:02
"안 쓰고 저축, 전 세계적 현상"
정부·중앙은행 재정·통화정책 난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맹위를 떨쳤던 올해 상반기에 은행권의 수신이 사상 최대 규모로 늘었다.

위기 상황에서 초유의 통화·재정정책을 쏟아냈더니 이 자금 중 상당 부분이 은행 금고로 다시 흘러 들어갔다는 것이다.

정부·중앙은행 입장에선 이런 상황이 곤혹스럽다. 공급한 유동성이 은행으로 다시 흘러 들어가는 구조라면 앞으로 통화·재정정책을 어떻게 구사해야 하는지 방향성이 모호해진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단기자금이 급격히 불어난 것도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27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기준 은행 수신이 1천858조원으로 작년 말 대비 108조7천억원 급증했다.

상반기 기준으로 은행 수신이 이처럼 빠르게 증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은행 수신 증가는 코로나19 사태와 상당한 연관 관계가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월별로 보면 코로나19 사태 발발 직후인 2월에 35조9천억원 급증했고, 3월에 33조1천억원, 5월에 33조4천억원이 늘었다. 감염자 수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된 6월에는 18조6천억원 늘어나는데 그쳤다.

은행 수신의 이처럼 가파른 증가는 기본적으로 대출 증가와 연동해 보는 시각이 많다.

1월부터 6월까지 은행의 기업·자영업자 대출은 총 77조7천억원이 늘었다. 같은 기간 가계대출도 40조6천억원 증가했다.

종합하면 올해 상반기 중 가계·기업 대출이 118조3천억원 늘어나는 사이 은행 수신이 108조7천억원 증가한 것이다. 가계와 기업 등 경제주체들이 위기 상황에서 대출을 급속히 늘렸지만 소비나 투자에 나서기보다 예금으로 움켜쥐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은행에서 늘어난 수신의 종류를 봐도 이런 가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늘어난 은행 수신 108조7천억원 중 107조6천억원이 수시입출식 예금이다. 반면 정기예금은 같은 기간 2조3천억원 줄었다.

한은 관계자는 "급격히 늘어난 수신은 결국 급격히 늘어난 대출과 연동돼 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면서 "가계나 기업이나 위기 상황을 맞아 일단 대출을 받아 현금을 확보했지만 막상 쓰지 않고 예금으로 쌓아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실물경제와 금융시장 간 괴리, 혹은 위기 상황에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괴리로 연결된다.

정작 돈이 필요한 기업·가계에는 은행이 돈을 빌려주길 꺼리지만, 신용도가 높은 기업·가계에는 풍부하게 자금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 여유가 있는 기업·가계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여유자금을 쌓아놓았으나 쓸 일이 없어 그냥 예금으로 쌓아두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저축이 급증하는 것은 현재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치솟는 저축률이 전 세계 중앙은행에 정치적인 딜레마를 제기하고 있다(Soaring savings rates pose a political dilemma for the world's central banks)'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런 문제를 제기했다.

코로나19 국면에서 가계 저축이 급증하면서 정부·중앙은행이 앞으로 통화·재정정책을 어떻게 구사해야 하는지 난감하다는 내용이다.

가계의 저축이 이미 많아 소비할 준비가 돼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부양책을 구사하면 경제가 과속의 영역으로 접어들 수 있다. 가계가 소비를 주저하고 자금을 계속 비축하는 상황에서 부양책을 끊어버리면 경제가 다시 악순환의 고리로 빠져들 수 있다.



이런 딜레마에 대해선 우리 정부 역시 함께 고민하고 있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제1차관은 24일 제18차 혁신성장 전략점검회의 겸 정책점검회의에서 "일각에서는 수요 부족보다 안전한 소비가 어려운 문제"라며 이런 화두를 꺼냈다.

안전한 소비의 이면에서 늘어난 가계저축이 있는데 봉쇄조치(lockdown)가 종료되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단기적인 성격의 저축인지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중장기적으로 쌓아놓는 저축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 저축 증가가 단기가 아닌 중장기적인 성격의 자금 비축이라면 소비 활성화 대책의 강도도 더 높게 끌어올려야 한다"면서 "다만 현재로선 늘어난 저축의 성격을 가늠하기 어려워 추가 대책의 강도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