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경제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경제원로의 혜안을 듣기 위해 정운찬 전 국무총리를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실에서 만났다. 정 전 총리는 지난 2018년1월부터 제 22대 야구위원회 총재로 일하고 있다. 오랜 두산팬이자 '야구예찬'이라는 책까지 집필한 자타공인 '야구광'인 정 전총리는 MB정부시절 국무총리와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서울대학교 총장을 거쳐 야구위원회 총재자리까지 자리를 꿰찼다.
한국 야구는 코로나 위기를 겪으면서 미국의 스포츠전문채널인 ESPN에 생중계되며 130개국에 송출되는 그야말로 '위기속 기회'를 찾은 선례를 남겼다. 코로나 사태를 뚫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재개한 유일무이 스포츠 경기였기 때문이다. 정 전 총리는 ESPN이 자신을 찾아와 중계를 제안했던 일을 떠올리며 '사실 처음에는 나도 의아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냐?"는 그들의 질문에는 "이렇게 빨리 올 것이라는 생각은 안했지만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당당하게 답했다. 한국야구의 응원문화 등 야구 강국인 미국과 일본에서 보지못한 한국 야구만의 문화에 강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실물경제 피해 당분간 지속"
행복한 표정으로 야구이야기를 이어가던 그에게 '경제'에 대해 물었다. 갑자기 표정이 심각해졌다. 정 전총리는 "앞으로 실물경제 어려움은 더 확산될 것"이라며 "코로나로 인한 경제 피해는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70년대 '대공황'을 언급하며 그 때와 마찬가지로 각국 중앙은행이 유동성공급을 통해 현재 안정을 되찾은 듯 하지만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 뿐 아니라 세계무역 부진으로 대기업까지 영향을 받게됐다는 설명이다.
◇ "교육·의료 비대면 한계..대면 못뛰어 넘어"
야구에서도 기회를 찾았듯 우리 경제가 주목하고 있는 언택트가 앞으로 확산될 것인지 물었다. 하지만 정 전 총리는 "한계가 있다"고 못박았다. 코로나로 비대면 활동에 대한 인식이 바뀐데다 제도적 기술적 변화가 있으면 더 확산될 수 있겠지만 특히 교육이나 의료분야에서 대면을 뛰어넘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정 전총리는 여전히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전날에도 온라인 강의를 진행했다는 정 전총리는 "기본적으로 교육은 대면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MIT등 미국의 주요대학에서도 온라인강의를 시행한지 오래됐지만 한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교육 뿐 아니라 의료에서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지만 대면이 더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비대면으로 설자리가 좁아질까봐 걱정했던 분야라면 주목해야할 조언이다.
◇ "극단적 방역, 경제회복 늦춰"
정 전 총리는 정부의 철저한 방역에 힘입어 '무관중' 야구 경기라도 열 수 있었지만 극단적인 방역은 단기적으로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고 강조했다. 프로야구도 확진자 수가 줄어들면서 5월 말부터는 일부 관중을 받을 계획을 세웠다. 자리를 멀리 떨어뜨리고 마스크 착용을 원칙으로 약 30%의 관중을 입장시킨 후 방역 상황에 따라 점점 비중을 늘려나갈 참이었다. 하지만 이태원이나 쿠팡에서 확진자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계획은 무산됐다. 정 전 총리는 "적어도 야구면에서는 경제가 덜 움직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며 "방역을 소홀히 하면 안되지만 그만큼 잃는 것도 있다"고 설명했다.
◇ "위기일수록 동반성장 해야"
'동반성장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정 전 총리는 코로나 위기극복 해법으로 저소득층과 이익을 공유하는 '동반성장' 정책을 제시했다. 동반성장 정책은 지난 2009년 총리 시절 대기업의 납품가 후려치기를 제한하고 대기업의 이익을 중소기업과 공유하도록 유도한데서 시작됐다. 그 영향으로 당시 만연했던 구두 주문이나 장기어음 대금결제, 기술탈취 등 불공정거래가 개선되고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정부의 중소기업물품 구매 등의 정책으로 이어졌다. 정 전 총리는 ""코로나로 성장은 더 안되고 불평등 더 심화될 것"이라며 "위기 상황일수록 저소득층이나 어려워진 사람들을 보듬어야 사회가 유지된다"고 강조했다.
◇ "코로나 아직 진행중..'함께' 극복해야"
정 전 총리는 '포스트 코로나'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직 사태가 진행중인데다 장기화될 수 있어 '포스트'를 붙이는 것이 적당한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어 중세 유럽에서 패스트가 번지면서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지만 역설적으로 지중해 주변 도시국가의 르네상스가 꽃피는 배경이 됐다는 점을 설명하며 그 중심에 모두가 협력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정 전 총리는 "전염병 극복이나 경제회복 모두 나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잘해야 한다"며 마지막으로 "빨리 가려면 혼자, 멀리가려면 같이"라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