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질환의 치료를 목적으로 개발된 일반 약물 가운데 항암 작용을 하는 약 50종이 새로이 발견됐다.
이 중에는 당뇨병, 염증, 알코올 중독 등에 쓰는 약물 외에 개(dog) 골관절염 치료제도 들어 있어 주목된다.
최근 국내에선 개 구충제로 대장암 치료에 효과를 봤다는 주장이 인터넛에 퍼져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 연구는, 미국 MIT(매사추세츠 공대)와 하버드대가 공동 운영하는 브로드 연구소(Broad Institute), 다나-파버 암 연구소(Dana-Farber Cancer Institute) 등 세계 굴지의 의학 연구 기관이 수행했다.
연구팀은 관련 논문을 저널 '네이처 캔서(Nature Cancer)'에 발표하고, 과학계가 공유할 만 한 세부 정보는 따로 인터넷( 링크 )에 공개했다.
20일(현지시간) 온라인(www.eurekalert.org)에 올라온 논문 개요 등에 따르면 이번 프로젝트는 브로드 연구소의 '약물 용도 재지정 허브(Broad's Drug Repurposing Hub)'를 이용한 전례 없이 큰 규모의 연구였다. 또한 암 이외의 다른 질환 치료를 목적으로 개발된 약물을 놓고, 항암 능력을 전수 조사한 첫 사례로 꼽힌다.
현재 이 DB(데이터베이스)엔 미국 FDA(식품의약국) 승인을 받았거나, 의료기관의 임상 시험에서 안전성이 검증된 약물(화합물 포함) 6천여 종이 등록돼 있다. 이 연구가 진행될 때는 4천518 종이 있었다고 한다.
연구팀은 먼저 브로드 연구소의 '암세포 백과사전(CCLE)' DB로부터 인간의 암 세포주(cancer cell line) 578종을 선별한 뒤 각 세포주에 PRISM이라는 DNA 바코드를 붙였다.
그런 다음 같은 바코드가 부착된 세포주별로 약물을 하나씩 투여해 암세포의 생존율을 측정하고, 일부라도 암세포를 죽이는 약물만 걸러냈다.
실험 결과, 어떤 약물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암세포를 죽였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항암제가 단백질 발현을 차단하는 것과 달리, 새로 발견된 약물 중 일부는 도리어 단백질 발현을 촉진하거나 단백질 사이의 상호작용을 안정화하는 작용을 했다.
예컨대 약 12종의 약물은, PDE3A와 SLFN12라는 단백질 두 종의 상호작용을 안정시키는 방법으로, PDE3A 단백질의 발현을 유도하는 암세포를 죽였다.
또한 항암 작용이 확인된 대부분의 약물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분자 표적과 상호 작용했다.
일례로 항염제 테폭살린(tepoxalin)은 MDR1 단백질이 과도 발현한 세포에서 미확인 표적을 공격해 암세포를 죽였다. MDR1은 흔히 암 화학 치료제에 대한 저항을 유발한다.
테폭살린은 원래 인간에 사용하는 용도로 개발됐으나, 승인은 개 골관절염 치료제로 나왔다.
이 밖에 음주 욕구를 떨어뜨리는 다이설피람(disulfiram)은, 메탈로티오네인(metallothionein) 단백질 결핍을 유도하는 돌연변이가 발현하는 암세포를, 당뇨병 치료제로 개발된 바나디움(vanadium) 함유 화합물은, 황산염 운반체 SLC26A2가 발현하는 암세포를 각각 죽였다.
연구팀은 CCLE에 등록된 암 세포주 유전체의 돌연변이 및 메틸화(methylation) 수위 등을 보고, 특정 약물이 해당 암 세포주를 죽일 수 있는지 예측하는 방법도 개발했다. 장차 약물이 가장 잘 듣는 환자를 선별하는 생물표지로 활용될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브로드 연구소의 암 프로그램 책임자인 토드 골럽 하버드 의대 소아과 교수는 "항암 작용을 하는 화합물을 하나만 찾아내도 행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많이 발견할 줄 몰랐다"라고 말했다
브로드 연구소 '약물 재지정 허브'의 설립자이자 논문의 제1 저자인 스티븐 코셀로 종양학 박사는 "새로 발견된 약물이 암세포를 죽이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새로운 암 치료법 개발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