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항생제를 써도 내성이 생겨 살아남는 균주를 가리켜 '슈퍼박테리아'(다제내성균)라고 한다. 이런 슈퍼박테리아 중에서도 환자에게 더 치명적이면서, 전 세계적으로 증가 추세에 있는 게 '카바페넴 내성 장내세균'(CRE)이다.
CRE는 일반 장내세균처럼 요로감염·폐렴·패혈증 등 다양한 감염성 질환을 일으킨다. 주로 병원 중환자실이나 요양원에서 인공호흡기, 소변 카테터, 정맥관 등을 착용 또는 삽입하고 있거나 오랜 기간 항균제 치료를 받은 환자에게서 그 위험이 증가한다.
CRE는 항생제에 내성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에 따라 '카바페넴 분해효소 생성 장내세균'(CPE)과 '카바페넴 분해효소 미생성 장내세균'(non-CPE)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도 CPE는 항생제를 직접 분해할 수 있는 효소를 생성하고, 다른 균주에까지 내성을 전달하는 능력이 있어 의료계가 더욱 경계하는 슈퍼박테리아로 꼽힌다. 한 연구에서는 CPE 감염이 non-CPE 감염보다 사망률이 4배나 더 높아 치명적이라는 보고가 나오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2013년 모 대학병원의 중환자실 환자 31명 가운데 23명에게서 CPE 집단 감염이 처음으로 보고된 이후 CPE의 병원 내 전파를 막기 위한 환자 격리, 손 씻기, 접촉 주의 등 위생관리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CPE 감염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 이유로는 무엇보다 불확실한 감염 경로가 꼽힌다.
그런데, 최근 국내 한 대학병원에서 병원 내 CPE 감염 원인 중 하나로 병실 내 싱크대(개수대) 등에 무심코 버린 음료수와 양치질을 지목해 주목된다.
7일 국제학술지 '병원감염저널'(The Journal of hospital infection) 최신호에 따르면 A대학병원 연구팀은 지난해 7월부터 12월까지 5개월에 걸쳐 심장내과, 흉부외과 병동 등에서 CPE 감염환자가 87명이나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자 자체 역학조사를 벌였다.
이 결과, 병실 내 수계 및 병동의 싱크대 배관 등에서 CPE가 분리됐다.
이는 병원 내에서 손 위생을 위해 설치한 싱크대 등의 수계에 무심코 버린 음료수와 같은 영양분이 배관을 오염시킬 수 있고, 이게 결국 다시 다른 환자에게 CPE가 전파되는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특히, 환자-대조군 연구에서는 오염된 싱크대에서의 양치질, 세수하기와 같은 수계와의 밀접한 접촉이 CPE 획득과 80%의 연관성을 가지는 위험 요인으로 평가됐다.
실제로 이 병원은 이후 싱크대 배관을 교체하고, 병원 내 수계 관리를 강화하자 유행하던 CPE 감염이 종식됐다고 밝혔다.
이런 연구 결과는 CPE 집단 발병을 막기 위해서는 병원 내 수계 관리가 중요하다고 지적한 선진국의 보고와 일치한다.
미국의 한 대학병원에서는 CPE 전파를 막기 위해 오물 저장고에 뚜껑을 설치하고 싱크대 배관을 가열, 진동하는 등의 조치를 시행한 후 CPE 감염이 감소했다는 보고를 내놨다. 영국에서도 싱크대와 배관이 CPE 전파의 원인으로 확인돼 배관 교체 등을 시행함으로써 유행을 종식한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서울아산병원 감염내과 김성한 교수는 "병원 내 싱크대와 같은 수계의 올바른 사용이 원내 다제내성균 전파를 막는 데 중요함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라며 "특히 우리나라처럼 다인실 구조이면서, 환자와 보호자가 병실에서 같이 생활하는 병실 환경에서는 CPE 발생과 관련된 병원 내 수계 관리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