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영국 식민 통치 시절의 유산인 '긴급정황규례조례'(긴급법)를 근거로 시위대가 얼굴을 못 가리게 하는 '복면금지법'을 전격 도입하자 수만 명의 시민이 격렬한 시위로 맞서면서 홍콩의 정치적 위기가 또 한 차례의 중대 분수령을 맞고 있다.
홍콩의 민주화 진영은 복면금지법 제정 자체보다 의회의 행정부 견제권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긴급법이 50여년 만에 발동됐다는 점에서 더 큰 위기감을 느끼는 모습이다.
사실상 사문화된 법조문으로 간주했던 긴급법이 52년 만에 깨어나면서 람 장관이 향후 언론·출판 검열, 인터넷 규제, 법원의 영장 없는 수색 등 홍콩 시민의 기본권을 광범위하게 제약하는 추가 행정 명령을 잇달아 내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보기 때문이다.
홍콩의 민주파 의원인 클리우디아 모는 최근 열린 긴급법 반대 기자회견에서 "캐리 람은 긴급법을 핵 폭격을 가할 수 있는 대량파괴무기처럼 쓰고 있다"며 "이 법은 더 많은 억압적인 규제 도입의 길을 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홍콩 내에서는 정부가 긴급법을 적용해 피의자 구금 시간을 현행 48시간에서 96시간으로 연장할 것이라는 소문, 입법회 승인을 받지 않고 경찰에 직접 격려금을 지급할 것이라는 소문, 시위대가 이용하는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 온라인 포럼 'LIHKG' 등을 차단할 것이라는 소문 등이 떠돌고 있다.
친중파 진영에서도 긴급법의 확대 적용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이 잇따르고 있다.
홍콩의 실질적인 내각인 행정회의 일원인 입궉힘(葉國謙)은 이날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긴급법을 발동하면 통신을 제한할 수 있다"며 "현재 홍콩 정부는 시위를 진압할 모든 조치를 고려하고 있으며, 장차 인터넷을 차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계엄령 선포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도 나왔다.
홍콩 법무장관 테레사 청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지금의 혼란보다는 계엄령 선포가 낫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정부는 폭력을 근절할 모든 법률적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혀 계엄령 선포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긴급법은 거의 100년 전인 1922년 영국이 식민지 홍콩에서 발생한 선원들의 파업에 대처하려고 만든 법률이다.
'긴급정황(상황)규례조례'는 긴급 상황을 맞았을 때 행정명령인 '규례'를 제정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제시하는 조례(법률)라는 뜻이다.
이 법은 홍콩 행정 수반(당시 총독)이 질서 회복을 위해 사실상 모든 규제를 도입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언론·출판 검열, 통신 제한, 육상·해상·공중 교통 통제, 인원의 억류·추방, 무역과 생산 제한, 재산 압류 및 징발, 법원의 영장 없는 시설 내 진입과 수색 허용 등이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반정부 시위대는 '복면금지법' 제정으로 긴급법이 쓰이기 시작한 이상 홍콩 정부가 앞으로 추가적인 사태 악화를 명분 삼아 추가 행정명령을 도입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실제로 최근 홍콩에서는 시위대가 중국계 상업시설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는 등 폭력 시위 양상이 짙어지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시위대의 공세에 경찰이 빈번하게 실탄 사격으로 맞서는 중에 시위 참가 학생 2명이 잇따라 총상을 입는 등 사태가 전반적으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어 홍콩 정부의 추가 강경 대처나 중국 중앙정부의 개입 우려가 커진 상황이다.
중국의 건국기념일 직후 홍콩 정부가 정치적 부담이 큰 긴급법 발동이라는 모험에 나선 것은 나름대로 그간 충분한 '명분 쌓기'를 했다는 판단에 기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람 장관은 지난 4일 긴급법 발동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 법이 시행된다고 해서 홍콩이 비상 상태라는 의미는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람 장관은 폭력 사태가 심각해질 경우 추가 행정명령을 내릴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았다.
과거 홍콩에서 긴급법이 발동돼 행정 수장에게 사실상 '비상 대권'이 부여된 것은 극심한 폭력 사태로 50명 이상이 숨진 1967년 반영 폭동 때가 유일한 사례였다.
긴급법은 성격상 우리나라 유신 시절의 긴급조치와 닮았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말기의 유신헌법은 행정 명령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 사실상 무제한 제약을 가할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했다.
1974년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1호를 시작으로 긴급조치는 9호까지 이어졌다.
긴급조치는 국회에 '해제 건의권'만 부여했다는 점에서 의회의 사후 통제권을 부여한 현행 헌법의 긴급명령과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홍콩의 현행 법제상으로는 긴급법에 따라 만들어진 행정명령이 사후 의회의 통제 대상이 되는지가 불명확한 것으로 알려졌다.
식민지 시절 만들어진 긴급법은 행정장관이 내린 긴급 명령인 '규례'는 행정장관 자신의 판단에 의한 철회 때만 효력을 잃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따로 의회의 사후 통제권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홍콩 정계 일각에서는 홍콩의 주권이 중국에 반환된 1997년부터 의회에 입법권을 부여하는 홍콩기본법이 시행된 만큼 옛 법인 긴급법에 근거해 도입된 '복면금지법' 등 모든 행정명령은 위헌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로 민주당원인 마틴 리는 로이터 통신에 "1997년부터는 의회만이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새 법(복면금지법)은 홍콩기본법에 저촉돼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논란을 의식한 듯 람 장관은 긴급법에 근거해 도입한 첫 행정명령인 '복면금지법'을 이달 중순 개회하는 입법회(의회)의 심의에 부치겠다고 공언했다.
이는 현재 홍콩 입법회 의석 70석 중 '건제파'(建制派)로 불리는 친중파가 넉넉한 과반을 차지하고 있어 복면금지법이 사후 승인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정치적 판단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홍콩 입법회 의석은 지역구 35석과 직능대표 35석으로 구성되는데 직능대표석은 건제파가 대부분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지역구 선거에서 범민주파가 선전해도 의회 주도권을 확보하기가 극히 불리한 구조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