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세계 대전’이란 용어가 자주 들린다. 시기적으로 2차 대전이 발생한지 꼭 80주년이 됐다. 경제적으로는 폴 크루그먼 뉴욕 시립대 석좌 교수는 지금의 상황이 2차 대전 이후 가장 안 좋다고 진단했다. 한 발 더 나아가 사디크 칸 런던 시장은 2차 대전 직전 상황과 흡사하다고 우려했다.
2차 대전 직전 상황을 보면 세계 경제 패권이 ‘팍스 브리태니아’에서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각국의 보호주의 물결은 ‘스무트-홀리법’으로 상징되듯 극에 달했다. 근린궁핍화(beggar-thy-neighbor) 정책으로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해당하는 자국통화 평가절하도 서슴없이 단행했다.
경제 외적으로는 독일의 나찌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로 대변되는 극우주의 세력이 기승을 부렸다. 각국이 분열될 때 중재자 역할을 목적으로 창설해 놓았던 국제연맹은 무력화됐다. 전례가 없는 대공황을 겪었던 세계 경제는 새롭게 탄생한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총수요 처방책에 의해 어렵게 탈출했다.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세계 경제는 중국의 부상이 이렇게 빠를 줄 아무도 몰랐다. 닐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는 중국과 미국이 함께 가는 ‘차이메리카(Chimerica=China+America)’ 시대가 아무리 빨라도 2020년이 넘어야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이보다 5년 이상 앞당겨 미국과 세계 경제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중국 중심의 ‘팍스 시키나’ 체제를 구축해 2차 대전 이후 지속돼온 미국 독주의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를 뛰어넘겠다는 야망이다. 이 때문에 세 확장 과정에서 중국의 ‘베이징 컨센서스’와 미국의 ‘워싱컨 컨센서스’ 간 충돌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두 국가 모두 ‘자본’을 매개로 했던 도널드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더 심해졌다.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시기를 자신의 집권 기간으로 봤던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집중 견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출범 초부터 보복관세 부과, 첨단기술 견제, 환율 조작국 지정 등 가용할 수 있는 수단은 모두 동원하고 있다.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보호주의 지수(1-자유무역지수)로 보면 2차 대전 이후 최고 수준이다.
자국통화의 평가절하는 1930년대와 비유될 정도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일 달러 약세를 외치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넘지 말아야 할 포치(破七), 즉 ‘1달러=7위안’를 넘어섰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발권력을 동원한 엔저 정책을 추진한지 7년이 넘었다. 유로화 가치도 유로 랜드 출범 이후 20년 만에 등가 수준(1유로=1달러)에 근접하고 있다.
각국 간 환율전쟁은 앞으로 더 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중앙은행(Fed)에 기준금리를 1% 포인트 이상 내리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 일본은행(BOJ)에 이어 유럽중앙은행(ECB)도 기준금리를 마이너스 국면으로 떨어뜨렸다. 중국 인민은행은 긴급 유동성 공급도 부족해 기준금리까지 내렸다.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 때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극우주의 세력도 갈수록 힘을 얻는 추세다. 독일, 프랑스 등 유로 랜드 핵심 회원국은 제1 야당 지위까지 올랐다. 헝가리 등 일부 동유럽 국가는 집권에 성공했다. 일본은 군사력을 ‘방어적’에서 ‘공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헌법 개정을 넘볼 정도로 극우주의 세력이 힘을 얻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세계 경제 안정을 위해 절실한 세계무역기구(WTO), 국제통화기금(IMF) 등과 같은 국제기구의 조정자 역할은 종전만 못하다. WTO는 ‘무용론 혹은 해체론’, IMF의 경우 ‘파산설 혹은 구제 금융설’까지 나돌 정도다. 국제규범의 이행력과 구속력은 2차 대전 이후 가장 약하다.
세계 경기도 심상치 않다. ‘전후 최장의 성장’이라는 타이틀이 붙긴 하지만 연평균 성장률은 직전의 전후 성장국면에 비해 절반 수준에 그치고 있다. ‘기업 내 혹은 기업 간 무역’으로 각국이 세계가치사슬로 연결돼 중심국에서 경기가 둔화되면 순차적으로 성장률 하락 폭이 더 커지는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가 우려된다.
성장 동인도 양적 완화에 따른 ‘부(富)의 효과’가 주요인인 점을 감안하면 지속 성장 가능성은 적은 대신 계층 간 소득 불균형은 더 심해졌다. 저금리 정책으로 부채가 크게 늘어나 중국과 같은 국가는 ‘빚의 복수’가 시작되고 있다. ‘3차 대전’에 대한 우려가 끊이질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경제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한 마디로 ‘퍼펙트 스톰’이 닥쳤다. 대표적인 비관론자인 누니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대형 악재가 한꺼번에 터져 특정국 경제(혹은 경제주체)가 위기에 봉착하는 경우를 말한다.
한국 경제에 닥친 대형 악재는 종전과 다른 두 가지 특징이 눈에 띤다. 하나는 한국이 직접 당사국이거나 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더라도 충격과 부담이 큰 대외 변수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대형 악재를 ‘행태 변수’와 ‘통제 변수’로 구분할 때 한국이 독자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적은 전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점이다.
당면한 최대 현안인 한·일 관계는 ‘일제 36년 지배’와 ‘북한 문제’라는 민감한 사안이 결부돼 있어 일단 상처가 나면 사후에 어떤 대책을 강구한다 하더라도 쉽게 아물어지지 않는다. 일본의 경제보복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사전 대응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가장 효과적인 사전 대책은 ‘신뢰를 잃지 않는 길’이다.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한일 양국이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최고 통수권자부터 만나야 한다.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대책은 정상이 만나 문제의 본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접점을 찾는 길이다.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수입선 다변화, 국산화 등은 그 다음 가져가야 할 차선책이다.
미·중 무역마찰도 장기화되고 있다. 경제패권 다툼과 같은 중대한 국제협상 과제는 ‘벼랑 끝 전략(brinkmanship)’으로 풀 수밖에 없다. 특성상 쉽게 타결되지도 않는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수세에 몰렸던 중국의 태도가 공세적으로 바뀌고 있는 점이다. 미·중 마찰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은 두 국가에 대한 수출 비중이 40%에 달할 만큼 ‘편향적’이다. 미·중 무역마찰 과정에서 불리한 중국 비중이 27%에 달한다. 지난 2년 동안 뼈저리게 경험했듯이 앞으로 장기화될 경우 한국 부담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내수 확대와 수출 다변화 정책 등을 통해 미·중 쏠림 현상을 시정해 나가야 한다.
북한 문제도 그렇다. 비핵화, 평화협정 체결, 종전 선언 그 어느 하나 한국이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만큼 ‘6자 관계(韓·美·中·日·러·북한)’ 틀 속에 풀어 나가야 한다. 한반도 문제는 독자적으로 앞서가다 보면 오히려 지정학적 위험이 더 커지는 독특한 세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냉혹한 국제 관계의 현실이다.
국정은 대내외 모든 현안을 골고루 다뤄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과 같은 특정 현안에 치우쳐 운용하다 의도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만만치 않은 후유증을 겪는다. 남북 관계 파트너였던 북한마저 군사 도발할 경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 국면에 빠지면서 6자 관계에서는 ‘패싱’ 문제에 봉착한다.
대내적으로 최대 악재는 ‘경기 침체’다. 현 정부가 추진해온 모든 경제정책의 총체적인 결과는 ‘경기 상황’으로 집약돼 나타난다. 한국 경제는 경기순환 상으로 ‘W’ 자형과, 지속 가능 성장 면에서 ‘디스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우려가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모두 장기 침체 가능성을 예고한다.
금리 인하, 추경 편성 등과 같은 총수요 진작책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계가 하나’인 시대에 있어서는 감세, 규제 완화 등을 통해 경제주체에게 경제하고자 하는 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는 공급중시 대책이 더 효과적이다. 세계적인 흐름에 맞춰 ‘갈라파고스 함정(세계와 격리)’에서 탈피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다.
한국 경제는 분명히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국민이 뽑아준 정책 결정권자와 집행자는 다음 세대와 국민을 생각하는 ‘정치가(statesman)’ 자세에서 당면한 퍼펙트 스톰 현안을 풀어야 한다. 다음 선거와 자신의 자리만을 집착하는 ‘정치꾼(politician)’ 입장에서 이 문제를 인식하고 풀어가다간 상황만 더 꼬인다.
정책 수용층은 네 탓 내 탓할 때가 아니다. 정책 결정권자와 집행자가 정치가 입장에서 퍼펙트 스톰 현안을 풀어가는 대책이 나오면 적극 협조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꾼 입장에서 대책을 강요한다면 더 이상 따라가면 안 된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 모두가 ‘프로보노 퍼블리코(공공선)’ 정신을 발휘해야 할 때다.
한상춘 / 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