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등 가상통화는 화폐도 금융상품도 아니라는 국제 회계기준이 제시됐다.
그간 가상통화의 성격을 두고 국가별로 인식 차가 존재했는데 국제적으로 통일된 기준이 제시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번 결정으로 국내에서는 가상통화의 제도권 진입이 한층 더 어려워졌고 기업의 가상통화 회계 처리나 정부의 가상통화 과세 문제에도 의미 있는 기준이 생겼다.
23일 한국회계기준원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 산하 국제회계기준(IFRS) 해석위원회가 지난 6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회의에서 가상통화 보유 시 IFRS 기준서를 어떻게 적용할지 논의한 끝에 가상통화는 금융자산으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IASB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 130여개국이 사용하는 회계기준인 IFRS를 제정하는 기구다.
기존 IFRS에 가상통화 관련 규정이 없어 각국이 혼란을 겪어온 만큼 기존 기준서를 어떻게 적용할지, 아니면 아예 새 기준서를 제정할지 등을 두고 수차례 회의와 잠정결정, 의견 조회 등을 거쳐 이번에 최종 유권해석을 내린 것이다.
IFRS해석위원회는 "일부 가상통화는 재화·용역과의 교환수단으로 사용될 수는 있지만, 현금처럼 재무제표에 모든 거래를 인식하고 측정하는 기준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아울러 다른 기업의 지분상품(주식)이나 거래 상대방에게서 현금 등 금융자산을 수취할 계약상의 권리와 같은 금융자산 정의도 충족하지 못한다고 봤다.
결국, 가상통화는 현금도 아니고 은행의 예금이나 주식, 채권, 보험, 신탁 등 금융상품과도 다르다는 게 IFRS해석위원회의 결론이다.
대신 IFRS해석위원회는 가상통화를 무형자산이나 재고자산으로 분류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통상적인 영업 과정에서 판매를 위해 보유하거나 중개기업으로서 매매하는 경우는 재고자산으로 보고 그 외에는 모두 무형자산에 해당한다는 게 이 위원회의 결정이다.
무형자산은 물리적 실체는 없지만 식별할 수 있는 비화폐성 자산을 뜻하는 것으로 영업권, 특허권, 상표권 등이 해당하며 재고자산은 팔려고 가지고 있는 상품이나 제품, 원재료 등을 지칭한다.
이번 IFRS해석위원회의 유권해석은 가상화폐 성격을 정의하는 첫 국제기준으로서 의미가 있다.
그동안은 세계적으로 가상통화의 성격을 두고 적잖은 혼란을 겪어왔는데 이번 결정으로 가상화폐의 정의에 사실상 매듭을 짓는 기준점이 생긴 것이다.
실제로 일본 등 일부 국가는 가상통화 활용과 제도권 편입에 적극 나섰지만, 중국과 러시아 등은 가상통화 거래를 아예 전면 중단시키는 등 국가 간에도 인식 차가 컸다.
미국과 유럽 국가 등은 거래를 중단시키지는 않았지만, 달러화나 유로화 등 기축통화에 위협이 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만큼 가상통화의 활성화를 그다지 달가워하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우리 정부는 가상통화를 화폐나 금융상품으로 인정하지 않고 제도권 편입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지난 6월 IFRS해석위원회 회의 때는 가상통화의 제도권 편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가상통화의 성격을 기존 기준서에 따라 결정짓고 새 기준서를 만들지 않기로 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등이 고려된 것이다.
한국회계기준원 관계자는 "당시 회의 때 가상통화에 대한 새 기준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다수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며 "새 기준서를 만들 경우 자칫 가상통화가 제도권으로 들어온다는 신호를 줄 수 있을까 우려하는 측면도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IFRS해석위원회 결정으로 국내에서 가상통화의 제도권 진입은 한층 더 요원해질 전망이다. 국제기구가 우리 정부의 기존 입장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에서도 가상통화에 투자하는 펀드 출시 시도 등이 있었지만 좌절됐고 주식시장의 기업공개(IPO)를 본뜬 가상통화공개(ICO) 등은 아예 불허돼 왔다. 앞으로도 이런 기조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가상통화의 회계처리를 놓고 어려움을 겪어온 기업들은 고민을 덜 수 있게 됐다.
IFRS 적용 의무 대상인 국내 상장사들은 앞으로 가상통화를 무형자산이나 재고자산으로 회계 처리해야 한다.
다만 외부감사 대상 법인 중 IFRS 대신 일반기업회계기준을 적용하는 비상장사는 종전처럼 자율적으로 회계 처리할 수 있다.
가상화폐거래소 '빗썸'을 운영하는 비상장사 비티씨코리아닷컴은 지난해 사업연도 감사보고서에서 가상통화를 유동자산 내 당좌자산 아래 '암호화폐' 명목으로 처리했고 '업비트'를 운영하는 비상장사 두나무는 유동자산 바로 아래 '암호화폐'로 처리했다. 금융자산, 재고자산, 무형자산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비티씨코리아닷컴은 당시 주석을 통해 "현행 일반기업회계기준에는 암호화폐에 대해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규정이 없으므로 회계정책을 별도 개발해 적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상통화를 금융자산이 아니라 무형자산이나 재고자산으로 규정함에 따라 과세 기준도 명확해질 전망이다.
그동안에는 가상통화를 두고 부가가치세를 부과할 수 있는지 논의가 분분했다. 가상통화를 지급수단인 금융자산으로 보면 부가세 비과세 대상이지만 상품 같은 재고자산이나 무형자산으로 보면 과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정부는 이미 가상통화에 대한 부가세 부과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 세계적으로 가상통화에 부가세를 매기는 나라가 거의 없고 이중과세 논란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소득세는 적용할 수 있다고 보고 추진 중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가상통화에 대해 부가세가 아니라 소득세 부과를 고려하고 있다"며 "양도소득으로 할지, 기타소득으로 할지 등 세부 사항은 법 개정 추진 과정에서 더욱 명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법인세는 우리나라의 경우 거래로 발생한 소득은 수익으로 본다는 포괄주의 개념을 채택하고 있어 현재도 가상통화 거래소 등이 거둔 이익에 대한 과세에 별문제가 없는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