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이후 세계와 한국 경제는 ‘뉴 노멀’ 시대에 접어들었다. 규범과 이론, 관행이 통하는 ‘노멀’ 시대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특히 경제 분야가 심하다. 자유방임 고전주의 ‘경제학 1.0’ 시대, 케인스언식 혼합주의 ‘경제학 2.0’ 시대, 신자유주의 ‘경제학 3.0’ 시대에 이어 ‘경제학 4.0’ 시대로 구분하는 시각도 있다.
뉴 노멀 시대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국가’를 전제로 했던 종전의 세계경제 질서가 흔들리는 현상이다. 세계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한 세계무역기구(WTO), 뉴 라운드, 파리 기후변화협정 등과 같은 다자주의 채널이 급격히 악화되는 추세다. 국제규범의 구속력도 구속력도 2차 대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지역 블록도 붕괴될 조짐이 일고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를 놓고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이탈렉시트(Italexit=Italy+exit)까지 거론되고 있다.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는 한 차원 낮은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으로 재탄생됐다. 다른 지역 블록은 존재감조차 없다.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쌍무 협력도 ‘스파게티 볼 효과(spaghetti bowl effect)’가 우려될 정도로 복잡해 교역 증진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스파게티 볼 효과란 삶은 국수를 그릇에 넣을 때 서로 얽히고설키는 현상을 말한다. A국이 B국, C국과 맺은 원산지 규정이 서로 달라 협정 체결국별로 달리 준비해야 할 수출업체에게는 불편을 초래하는 경우다.
국제통화질서에서는 미국 이외 국가의 탈(脫)달러화 조짐이 뚜렷하다. 세계경제 중심권이 이동됨에 따라 현 국제통화제도가 안고 있었던 문제점, 즉 △중심통화의 유동성과 신뢰성 간 ‘트리핀 딜레마(Triffin's dilemma)' △중심 통화국의 과도한 특권 △국제 불균형 조정메커니즘 부재 등이 심해지면서 탈달러화 조짐이 빨라지는 추세다.
국제금융기구의 분화 움직임도 뚜렷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중국판 IMF인 긴급외환보유기금(CRA)이 조성됐고, 유럽판 IMF인 유럽통화기금(EMF) 창설이 검토되고 있다. 중국 주도로 세계은행(World Bank)과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대항하기 위해 신개발은행(NDF)과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AIIB)이 설립됐다.
세계 경제와 국제통화질서의 틀(frame)이 흐트러지면 혼란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 그 대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같은 포퓰리스트가 판친다. 세계화 쇠퇴를 의미하는 ‘슬로벌라이제이션(slobalization)’이란 신조어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슬로벌라이제이션은 올해 다보스 포럼에서 제시됐던 ‘세계화 4.0(globalization 4.0)’과 같은 의미다.
‘슬로벌라이제이션’으로 대변되는 뉴 노멀 시대에 있어서 한국처럼 대외환경에 크게 의존하는 국가일수록 불리하다. ‘대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작년 말 크리스토프 하이더 주한 유럽상공회의소(ECCK) 사무총장이 ‘갈라파고스 함정'에 빠지고 있다’고 발언한 정도로 뉴 노멀 시대에 나타나는 변화를 읽지 못하고 있다.
세계 흐름과 동떨어진 사례는 의외로 많다. 정부의 역할이 세계는 ‘작은 정부’을 지향하고 있으나 한국은 올해 슈퍼 예산이 상징하듯 갈수록 커지고 있다. 거시경제 목표도 ‘성장’ 대비 ‘소득주도 성장(성장과 분배 간 경계선 모호)’, 제조업 정책은 ‘리쇼어링’ 대비 ‘오프쇼어링’, 기업 정책은 ‘우호적’ 대비 ‘비우호적’이다.
규제 정책은 ‘프리 존’ 대비 ‘유니크 존’, 상법 개정은 ‘경영권 보호’ 대비 ‘경영권 노출’, 세제 정책은 ‘세금 감면’ 대비 ‘세금 인상’, 노동 정책은 ‘노사 균등’ 대비 ‘노조 우대’로 대조적이다. 명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일부 정책결정과 집행권자의 의식과 가치가 이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갈라파고스 함정에 빠지면 가장 우려되는 것은 우리 경제에 대한 해외 시각이 악화되는 점이다. 국가신용등급이 정체된 지 3년이 됐다. 글로벌 벤치마크 지수인 모건스탠리 캐피털 인터내셔널(MSCI) 지수에서는 선진국 예비명단에서 신흥국으로 탈락한지 4년이 넘었지만 재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 기업과 자금도 들어오지 않거나 빠져 나간다. 주한 외국기업 단체는 각종 규제강화 등으로 경영여건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고 연일 비판하는 가운데 실제로 철수하는 외국 기업과 금융사가 늘고 있다. 우리 기업과 돈 그리고 사람도 한국을 떠나고 있다. 이른바 ‘3대 공동화 현상’이다.
특정국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돈, 그리고 기업이 몰려들어야 한다. 던킨 도넛처럼 핵심 중심부가 비워있으면 대내외 변수에 취약하고 경기가 쉽게 불안해지는 ‘천수답 경제’가 된다. 선진국에서 ‘미국 경제’, 신흥국에서 ‘인도 경제’가 잘 나가는 것은 대폭적인 감세 등으로 기업과 함께 자본과 돈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종전의 이론이 통하지 않는 ‘뉴 노멀’ 시대에 인플레이션과 관련해 새로운 용어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미국 헤지펀드 업체인 시브리즈파티너스의 더글라스 카스 대표가 처음 사용한 ‘스크루플레이션(screwflation)’이다. 쥐어짠다는 의미의 '스크루'와 물가가 올라가는 ‘인플레이션’의 합성어다.
스크루플레이션은 스테그플레이션과 구별된다. 후자는 거시경제 차원에서 경기가 침체되면서 지표 물가가 올라가는 현상이지만, 전자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쥐어짤 만큼 일상생활이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체감 물가, 즉 장바구니 물가가 올라가는 현상을 말한다. 국민 입장에서는 전자가 나타나면 후자보다 더 어려운 상황을 맞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올해 하반기 한국 경제가 스크루플레이션을 겪을 국가로 보고 있는 점이다. 가계부채는 1,500조 원을 넘어 세계 10대 고위험군에 속한 지 오래됐다. 모건스탠리의 경우 올해 성장률이 1%대까지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우리 국민이 느끼는 체감 물가는 뛰기 시작했고 앞으로 더 올라갈 것으로 예상된다.
스크루플레이션이 무서운 것은 경제고통(실업률+물가상승률-성장률)가 급격히 높아지는 점이다. “손에 들어오는 소득이 줄어 쥐어짜더라도 체감물가가 올라 살기가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 경기 얘기하면 우리 국민 입에서 처음 떨어지는 이 하소연을 정책당국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제정책의 최우선순위를 민생경제 안정부터 뒤야 한다.
특정국이 갈라파고스 함정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정책결정과 집행자일수록 글로벌 마인드가 부족하고 훈련된 글로벌 인재가 배제돼 있을 때다. 국정운영 우선순위도 ‘대외’보다 ‘대내’, 경제 각료가 ‘유연한 사고’보다 ‘경직된 사고’를 갖고 있을 때도 나타난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의 이념이나 주장의 틀 속에 갇혀있는 경우다.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한국 경제가 더 이상 갈라파고스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세계 흐름에 동참해야 한다. ‘시간만 지나면 되겠지’ 하면서 경제정책과 운용에 변화를 주지 않으면 ‘삶은 개구리 신드룸(boiled frog syndrome)’처럼 어느 날 갑자기 죽는다. 그때는 베네수엘라 전철을 밟게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한상춘 / 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사 논설위원(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