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최대 가전전시회 'IFA 2019'가 현지시간 11일 6일 간의 일정을 마치고 막을 내렸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단연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초고화질 '8K TV 전쟁'이었다. 기술력으로 무장한 중국 업체들의 부상으로 한국과 중국 간의 대결이 될 줄 알았던 이번 IFA는 공교롭게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집안 싸움'이 됐다. 국내를 대표하는 양사는 '가전 맞수'로 지난 50년 동안 크고 작은 경쟁을 이어왔다. 올해는 8K TV가 도마 위에 올랐다. LG전자가 "삼성전자의 8K TV 화질이 4K 수준이다"며 사실상 "삼성전자의 8K TV는 가짜다"고 비난한 것. 전 세계 언론인과 바이어들이 대거 모여든 국제박람회에서 국내 회사끼리 이름을 들먹이며 비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IFA 개막일부터 LG전자는 삼성전자에 무섭게 맹공을 퍼부었다. 키워드는 '리얼 8K', 리얼이 아닌 것을 공격하겠다는 의지였다. LG전자는 자사의 나노셀 8K TV와 삼성의 QLED 8K TV를 나란히 전시하고 공개적으로 깎아 내렸다. 자사의 화질 선명도가 90%인데 반해, 경쟁사의 화질 선명도(CM)는 12%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LG전자가 OLED TV가 아닌 나노셀 TV를 이용한 것도 공격의 일환이었다. LG전자는 "삼성전자의 제품과 비교하기에 OLED TV의 수준이 너무 높다"고 OLED TV 대신 나노셀 TV를 배치한 이유를 설명했다. QLED, SUHD, 나노셀 등 이름은 달라도 모두 발광다이오드, LED 베이스인데, OLED는 자발광으로 기술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LG전자는 삼성전자의 QLED에 맞는 급은 나노셀이라고 꾸준히 알려왔다.
개막 다음날에도 LG전자는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현지시간 7일 TV 사업운영센터장인 박형세 부사장 주도로 열린 테크 브리핑을 열고, "삼성전자의 8K TV는 국제디스플레이계측위원회(ICDM)의 규격에 맞지 않는 제품이다"고 주장했다. ICDM은 1962년 설립된 디스플레이 전문기구 SID 산하 위원회다. 디스플레이 관련 성능 측정 기준과 방법 등에 대한 기준을 제공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8K TV는 픽셀수와 화질 선명도(CM)를 모두 충족해야 한다. 박 부사장은 "경쟁사 제품의 픽셀수는 4K의 4배로 8K TV 기준에 맞지만, CM은 12%에 불과해 이 기준으로는 8K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브리핑을 여는 취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소비자에게 진실을 알리고 표준이 무엇인지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설명했다.
화룡점정은 브리핑 직후 이어진 광고 시연이었다. 광고를 보던 기자들 사이에서 "심의를 통과한 광고가 맞냐"는 놀라움의 탄식도 나왔다. 광고 내용은 삼성전자의 QLED TV가 LED를 모방한 LCD TV에 불과하다는 것. LG전자에 따르면 LED TV는 컬러를 만들려면 백라이트가 필요한데, 백라이트 때문에 블랙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고 컬러가 과장될 수 있다. 그러나 LG OLED TV는 백라이트 없이 스스로 빛을 내 블랙도 정확하게 구현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백라이트가 필요한 LED TV는 '흉내낼 수 없는 기술력'이라며 앞글자가 다른, 앞에 A가 붙든 B가 붙든 Q가 붙든 다 LED TV일뿐 이라고 말한다. 특히 QLED TV 로고를 3초간 보여주며 삼성전자를 정조준했다. 17일에는 서울에서 별도의 브리핑을 열겠다며, 사실상 2차전을 선포했다.
삼성전자는 LG전자의 공세에 태연하게 반응했다. 태연한 척이라는 말이 맞겠다.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인 한종희 사장은 "많은 사람들이 1등을 따라하려 하고 헐뜯는다"고 답하면서도 더이상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공식적인 입장은 없었지만 IFA에 참석한 삼성전자 관계자들은 일종의 축제 같은 IFA에서 국내 업체로부터 비방을 듣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기도 했다. 일부 삼성 직원들은 "LG가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다"고 말했다. 화질이라는 게 한 가지 기준으로만 측정할 수 없고 LG가 제시한 수치의 근거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장에 있던 일부 기자들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불과 3년전 삼성전자가 화질 선명도(CM) 값을 강조할 때 LG전자는 CM은 실제 TV 화질과 관계없다고 반박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인화'로 대표되던 LG가 달라졌다. SK와의 배터리 맞소송, 삼성 8K TV 공개 비판 등 경쟁사와 '전면전'에 나섰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구광모 회장 취임으로 이른바 '4세 경영'이 본격화한 뒤 그룹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그룹 주력 사업인 전자와 화학에서 적극적 면모를 보이는 모습이다. 여기에 8K TV 분야에서 삼성전자의 성장세가 두드러지는 점도 한몫했다. 지난 상반기 삼성 QLED TV는 약 190만대 판매돼 지난해 보다 2배 이상 는 반면 LG전자 OLED TV의 판매량은 소폭 증가한 130만대에 그쳤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QLED TV=프리미엄'이라는 공식 아래 ‘고가 전략’을 펴다가 최근 들어 제품 가격을 낮추면서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번 IFA에서 55인치부터 98인치까지 8K TV 풀 라인업을 완성하기도 했다.
데자뷰일까. 두 회사는 이미 여러 번 맞붙었다. 5년 전 IFA에서는 세탁기였다. 'IFA 2014' 때 삼성전자는 전시장에 있는 자사 세탁기를 파손했다며 LG전자 최고경영자인 조성진 부회장을 고소해 소송전으로 비화했다. 4K가 막 도입된 3년 전에도 화질 선명도를 두고 두 회사가 싸웠다. 그때는 삼성전자가 LG전자를 공격했다. 삼성전자는 지금의 LG전자처럼 "LG전자의 4K TV가 4K가 아닌 3K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채택한 'RGB' 방식의 화질 선명도는 95%에 달하는데 LG의 방식인 'RGBW'는 60%에 불과하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ICDM은 정기총회에서 'RGBW'를 4K로 인정하되 화질 선명도 값을 수치로 표기할 것을 의무화했다. 삼성전자는 "4K TV 고르실 때 선명도를 꼭 확인하세요!"라는 홍보 문구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화질 선명도에 대한 LG전자에 지적에 대해 별다른 대답을 내놓지 않는 상황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시장을 선도할 때와 아닐 때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고 기준이 제시될 때마다 양사는 충돌했다. 이번에도 일본, 중국 업체들이 8K TV를 대대적으로 선보이며 시장이 커지자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 모양새다. 개인적으로 삼성전자와 LG전자의 8K 화질을 두고 누가 낫다고 비교하기 어려웠다. 일반 소비자가 육안으로 품질 차이를 체감하기 힘든 만큼 어떤 식으로든 경쟁력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삼성전자가 독주하고 있는 글로벌 TV 시장에서 LG전자가 판을 흔들어보려 했다는 시각도 있다. 그렇다면 종국에 8K TV의 승자는 누가 될까. 현재까지는 목소리를 높이는 LG전자에 힘이 쏠린다. 삼성전자가 이번 사태에 대해 어떤 대응도 하지 않는 것에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나서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어쨌든 8K TV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려는 양사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