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2일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 명단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2차 경제보복'에 나서면서 한일관계가 그야말로 '전면전' 모드로 치닫고 있다.
'단호한 상응조치'를 예고한 우리 정부가 당장 직접적 타격을 받고 있는 경제분야를 넘어 외교·정치, 안보, 그밖의 분야에서 가용 자원을 동원한 전방위적 반격을 시작한데 따른 것이다.
정부는 이미 백색국가 리스트에서 일본을 제외해 경제 분야에서 '눈에는 눈' 식의 대응에 나서며 '포문'을 연데 이어 청와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GSOMIA) 파기까지 검토할 뜻을 내비치는 등 외교·안보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여기에 국회 본회의에서는 일본의 보복적 수출규제 조치 철회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되는 등 정치권도 단일대오를 형성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주재한 긴급 국무회의에서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며 부당조치를 강행한 일본 아베 신조 정권을 향해 전례없는 '결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 韓 화이트리스트서 日 배제…국내 피해기업은 전폭적 지원
'치킨게임'을 우려해 맞대응을 자제해 온 정부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화이트리스트에서 일본을 제외하는 상응조치를 꺼내 들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관계부처 합동브리핑에서 일본의 조치에 맞서 우리 정부도 수출 관리를 강화하는 절차를 밟아 나가겠다고 발표했다.
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일본이 우리 경제를 의도적으로 타격한다면 일본도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일본이 한국의 백색국가에서 빠지면 한국산 물품을 수입하기 위해 산업통상자원부 등 수출허가기관의 개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본 전체 수입액에서 대(對)한국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4.1%다.
한국 전체 수입액에서 대일 수입액이 차지하는 비율인 9.6%보다는 작은 수치지만, 대한국 수입 비중이 큰 품목을 중심으로 규제하면 일본 산업에도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일본산 상품·서비스에 시장접근을 제한하고 관세를 인상하거나 기술 규정 및 표준 인증심사 강화와 같은 비관세장벽을 세우는 방안이 상응조치로 나올 가능성이 거론된다.
일본의 조치로 피해를 보는 기업을 지원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정부는 한국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돼 이번 조치와 관련한 전략물자 1천194개 중 159개 품목이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해당 품목을 관리품목으로 지정해 대응하는 한편, 일본의 수출 통제로 대체국에서 해당 물품이나 원자재를 수입하면 기존 관세를 40%포인트 내에서 경감해주는 할당관세를 적용하는 등의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국내 소재부품산업 업종별 경쟁력 강화방안과 추가 규제 품목에 대한 기술개발·상용화·양산단계 예산 지원 등 세제, 금융, 예산, 제도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방안도 마련한다.
정부는 일본의 결정이 자유무역에 관한 WTO(세계무역기구) 규범에 위배된다는 점을 들어 이른 시일 내 일본을 WTO에 제소한다는 방침도 세웠다.
다만 WTO 제소는 최종 판정까지 2년여가 걸려 당장 일본에 타격을 주거나 상황을 바꾸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 靑 "GSOMIA 유지가 맞는지 검토"…협정 파기도 불사하나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정부는 우리에 대한 신뢰를 잃고 안보상 문제를 제기하는 나라와 과연 민감한 군사정보 공유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맞는지를 포함해 종합적 대응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소미아는 그동안 일본이 추가적인 경제 보복 조치를 단행할 경우 우리 정부가 맞대응 차원에서 쓸 수 있는 카드로 계속 거론돼 왔다.
지소미아는 한국 정부가 군사정보 분야에서 일본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
군사 분야에서 일본과 맺은 유일한 협정이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도 크다.
일본의 정보 수집 및 분석 능력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한국이 북중 접경지역의 인적 네트워크(휴민트), 군사분계선 일대의 감청수단(시긴트) 등으로 수집해 전달하는 대북 정보에 대한 일본의 의존도도 낮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지소미아 연장을 거부함으로써 일본에 타격을 줘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는 양상이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소집한 일본 경제침략 관련 비상대책 연석회의에서 "이렇게 신뢰 없는 관계를 갖고 지소미아가 과연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하는 등 여권을 중심으로 지소미아 파기 요구가 거세다.
그러나 지소미아 파기가 동북아 지역 내 한미일 안보 협력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만큼 해당 조치가 쉽게 이행될지는 미지수라는 전망도 나온다.
◆ "미국도 역할 다 하겠다고 이야기"…국제 여론전 등 외교적 해법도 병행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우리 정부는 앞으로도 국제무대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우리 입장을 밝히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 역시 국무회의에서 "일본 정부가 일방적이고 부당한 조치를 하루속히 철회하고 대화의 길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해 외교적 해결의 길을 열어놓은 만큼 이와 관련한 조치도 병행해 이뤄질 전망이다.
이런 맥락에서 주목되는 것은 미국의 역할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이날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 관련 외교장관회의 계기에 이뤄진 한미일 3국 외교장관회담 뒤 기자들과 만나 "미국도 이 상황을 많이 우려하고, 앞으로 어렵지만 어떤 노력을 할지 그 역할을 다하겠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전했다.
결국 첨단산업 분야의 글로벌 공급망이 훼손되는 것은 물론 동북아 지역 안보지형 상 미국의 관여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과 맞물려 정부가 한미일 간 물밑 접촉에 공을 들일 가능성도 있다.
이와는 별도로 정부는 국제적인 여론전을 통해 일본의 조치가 부당하다는 점을 알리는 데도 공을 들일 전망이다.
정부는 이례적인 장문으로 발표한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일본 정부가 부당한 경제보복 조치를 즉각 철회하지 않는다면, 양국 관계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을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며 "이에 따른 책임은 일본 정부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고 강조했다.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은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 일본대사를 초치해 "이런 보복적 경제 조치를 취하는 국가를 우리 국민은 더이상 우호국으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 정치권 日규탄 결의안 만장일치 가결…전현직 靑 참모들도 여론전 가세
정부의 맞대응에 정치권도 여야 없이 힘을 보태는 모습이다
국회는 이날 열린 본회의에서 일본 정부의 보복적 수출규제 조치 철회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은 재석의원 228명 전원이 찬성해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윤상현 외교통일위원장은 제안 설명에서 "일본 정부의 부당한 조치를 규탄하고 즉각적인 철회를 요청하는 동시에 일본 정부의 책임 있는 태도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전현직 참모들도 SNS를 통해 여론전에 가세했다.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페이스북 글을 통해 "외국이 침공했는데 '우리나라에도 문제가 있잖아'라는 식의 양비론과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대한 냉소는 '의병'과 '독립군'에 대한 비하의 현대판"이라며 "우매한 나로서는 이런 고담준론은 못하겠다"고 주장했다.
조 전 수석은 "싸울 때는 싸워야 협상의 길도 열리고 유리한 협상도 끌어낼 수 있다"며 "여건 야건, 진보건 보수건 피아를 분명히 해 모든 힘을 모아 반격하자"고 말했다.
조한기 청와대 1부속비서관은 페이스북 글에서 "심한 모욕감과 분노를 느끼는 아침"이라며 "일본의 의도는 한국을 희생양 삼아 1945년 이전의 군국주의 패권 국가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 비서관은 "전화위복의 기회"라며 "진정한 한일전에서 우리가 이긴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