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I특공대는 현장의 기자들이 직접 부딪히고 경험하며 쓸모있는 정보를 전해드리는 체험형 영상 취재기입니다.》
지난달 초 지인들과 함께 있던 단체 채팅방에 한 사연이 올라왔습니다.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 다니고 있는데, 집주인으로부터 7천만원 가량의 전세보증금을 받지 못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집주인과 세입자간의 마찰이겠거니 하던 찰나, 삼성 수원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또다른 지인이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맞다. 우리 동네인데, 밤에 편의점 나가면 우는 사람 엄청 많다"
이밖에도 '신입사원이 입사하자마자 빚부터 지게됐다', '신혼자금인데 돌려받지 못 해 결혼을 미뤘다'는 등 피해 사실이 더 접수됐습니다. 피해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체감하고 취재를 시작할 때쯤 '수원 삼성전자 인근 사회초년생들의 전세금을 조직적으로 편취한 변00 씨 일가의 처벌을 바란다'는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 글이 올라왔습니다. 삼성전자 직원 포함 약 800여명이 전세보증금 500억원의 피해를 입을 것이란 주장은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 언론 보도는 빙산의 일각…갭투자 파산 아닙니다
직접 현장에 가보니 수원시 영통구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동문에서 100m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7층짜리 G타운 건물 10채가 나란히 들어서 있었습니다. 이곳에 사는 가구만 400여세대, '한 사람이 이걸 다 갭투자했다'는 게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규모였습니다.
상당수 언론은 이 사건을 집주인이 갭투자에 뛰어들었다 파산해 세입자에게 돈을 돌려주지 못한 사례로 다뤘습니다. 갭투자란 부동산의 매매가격과 전세가격의 차이가 적을 때 그 차액만으로 집을 사들인 뒤 집값이 오르면 되팔아 수익을 남기는 투자 기법입니다. 기존 부동산 보증금까지 떠안는 위험한 방식이지만 부동산 가격만 꾸준히 오른다면 남는 장사인 셈이죠. 그런데 현장을 취재하다보니 단순한 갭투자 사기가 아니라는 추가 제보가 이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잘 알고 있는 현지 공인중개사는 "갭투자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집주인 욕심이 너무 컸다. 땅만 투자 안했으면..."이라면서 말을 줄였습니다.
취재 내용을 종합하자면, 국민청원에 등장한 집주인 변00 씨는 사실 6남매로 일가족이 수원시 원천동과 망포동, 매탄동 등 일대에 26채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 등 기업 덕에 전세 수요가 끊이지 않는 지역에 근린생활시설(근생)과 다가구주택을 지어 전세보증금을 받고 그 돈으로 다시 건물과 땅에 투자를 하는 등 사업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약 400억원 규모의 땅 투자에 차질이 생기면서 건물을 담보로 잡은 은행에 이자를 못 내게 됐습니다. 세입자들이 보증금을 받지 못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 집주인 아빠와 공인중개사 딸…"같은 중개사라도 속는다"
중개사 말대로 단순한 투자 실패일까. 피해자들은 투자 실패가 아닌 의도적인 부동산 사기라고 주장합니다. 원천동 건물에 전세금 7천만원이 묶인 삼성전자 직원 박경민(28) 씨는 "집주인 변00 씨의 딸 B씨가 이 일대에서 공인중개사로 활동하며 수백명의 세입자를 모았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공인중개사인 딸이 집주인인 아버지와 그 가족의 물건을 소개하면서 제대로 된 정보를 세입자(임차인)들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박 씨가 전세로 살고 있는 건물은 시세 20억원 가량으로, 등기부등본상 은행의 채권최고액이 12억원 가량 잡혀 있었습니다. 시중은행에서 보통 대출금액의 120%를 채권최고액으로 잡는다고 봤을 때, 10억원 가량의 대출이 껴 있는거죠. 일반적으로 대출금액이 건물시세의 30%만 넘어도 위험하다고 평가받지만 공인중개사는 어떠한 경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박 씨는 "공인중개사가 위험하다는 경고를 전혀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가족이 하는 거라 믿어도 된다고 얘기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회초년생이 잘 알아보고 계약했어야지'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임대차계약에서 최종 계약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피해자들은 등기부등본을 꼼꼼히 살폈더라도 사기를 피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등기부등본에는 건물을 담보로 잡은 대출만 나올 뿐, 계약 당사자가 몇 번째로 들어가는 세입자인지, 전월세 비율은 얼마인지, 전세금 총액은 얼마인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건물에 대한 모든 정보는 오직 집주인만이 알 수 있는 현행 법에 허점이 있는 겁니다. 일반적인 공인중개사들도 집주인에게 물어물어 알고 있을 뿐입니다.
세입자들을 더욱 화나게 하는 대목은 공인중개사 B씨가 사실이 다른 가짜 현황표를 보여주며 세입자들을 속였다는 것입니다. B씨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현황표를 입수해 살펴보니, G타운 105동 305호의 경우 월세 42만원에 보증금 1,000만원으로 기재돼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계약은 전세 6,500만원으로 체결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월세가 많아 선순위보증금이 적으니 전세로 들어오라며 세입자를 유혹했다는 거죠. 이에 대해 변00 씨 일가 건물에 전세금 6,500만원이 묶인 또다른 세입자 김진우(가명) 씨는 "공인중개사가 집주인과 한통속으로 하게 되면 투자의 귀재가 와도 당할 수밖에 없다. 이곳 세입자 중 한 명은 아내가 공인중개사인데도 속았다"라고 말했습니다.
● 형사소송으로 번지는 전세보증금 미반환 사건
이런 이유로 세입자들은 집주인과 공인중개사가 공모해 적극적으로 세입자들을 기망한 행위로 보고 형사소송을 준비 중입니다. 현재까지 집단소송에 참여하겠다고 밝힌 사람만 400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대부분 삼성전자와 그 계열사 직원들입니다. 이들이 민사가 아닌 형사소송을 택한 이유는 집주인 변00 씨 일가가 기망행위를 한 것 뿐 아니라 재산을 숨길 가능성이 크다고 봐서입니다.
앞서 "집주인 일가가 땅에 투자했다가 실패했다"는 인근 중개사의 얘기 기억하시나요? 변00 씨 일가는 지난해 가족법인을 만들어 원천동 일대 약 4,600평의 물류센터 부지를 매입했습니다. 새로운 부지에 오피스텔을 건립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세입자들은 이 땅 매입 비용 약 400억원 가운데 70억원가량을 전세보증금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통상 임대차계약 갈등에 의한 소송은 개인간의 민사소송으로 해결합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 피해자들은 전세보증금이 법인으로 들어가 목돈을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이 커짐에 따라 형사소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의 집단소송을 맡은 법무법인 태현의 정영호 변호사는 "집주인 일가가 개인명의로 된 재산을 빼돌려서 가족법인을 만들어 부동산을 소유하는 형태로 재산을 빼돌리면 추후에 민사소송을 제기해 판결을 받는다하더라도 집행의 어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모두 다 설명하기도 힘든 이런 세입자들의 의혹 제기에 집주인 변00 씨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연락을 취했습니다. 전화도 문자 메시지도 받지 않아. 집과 회사까지 찾아가 봤지만 끝내 답을 듣진 못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집주인 변 씨가 아예 잠적은 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변00 씨는 '입주민께 드리는 사과문'을 통해 "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낀다. 면목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문서로는 재투자 실패를 인정하면서 피해 최소화를 약속했지만, 세입자들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재투자 실패를 이유로 파산해버리고 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 투명한 주택 정보 파악을 위한 제도 개선 필요
전체 800여명의 전세보증금 500억원이 걸린 수원시 전세보증금 사태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수원시에서 TF팀을 꾸려 시민단체와 함께 대응책을 준비하는 등 지자체까지 나섰고, 삼성전자도 회사 차원에서 법률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집주인 변00 씨 일가는 세입자들의 집단소송을 맡은 법무법인을 통해 보증금을 변제할 의향이 있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입자들은 구체적인 변제 실행방안이 나올 때까지 기약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집주인 변 씨 일가의 의도는 앞으로 수사·사법기관을 통해 드러날 겁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현 제도상 세입자들이 자신이 살 집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아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공인중개사라도 집주인의 주택 정보 열람이 가능하도록 공인중개사법을 바꿔달라는 의견부터, 아예 주택임대차내용을 공시하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제안까지 현장에선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뒤늦게나마 국회 여당과 정부가 공인중개사의 고지 의무를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또 다른 누군가가 사회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수천 만 원의 빚을 지는 일이 없도록 관련 제도가 하루 빨리 마련되길 기대합니다.
[제대로 알기] 내 전세보증금, 어떻게 지킬 수 있나요?
안타깝게도 현행 제도상 세입자가 들어가고자 하는 주택의 정보를 얻는 방법은 많지 않습니다. 뻔하고 슬픈 교훈이지만 위험한 건물 징후를 포착하고 피하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입니다. 그 방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등기부등본 꼼꼼히 살펴보기
등본상에서 가장 먼저 소유자가 집주인이 맞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또 문서 맨 밑 열람일시를 통해 오늘 날짜에 발금한 서류가 맞는지 체크해야 합니다. 그 다음 근저당권이 설정된 내역을 볼 수 있는데, 쉽게 말해 대출을 얼마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근저당자가 시중은행이라면 채권최고액은 보통 대출금액의 120%입니다. 근저당자가 개인이름이라면 사채입니다. 사채의 경우 채권최고액을 150%이상까지 잡을 수 있다고 하니 눈여겨 봐야합니다. 등본 뒷장으로 넘어가 주택임차권이라 적혀 있고 임차보증금이 잡혀 있다면 그건 기존 세입자가 전세보증금을 그 금액만큼 돌려받지 못하고 나갔다는 말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
등본상에 가압류 현황 등도 나와있지만 앞서 본 사례처럼 기존 세입자들의 상태와 보증금 총액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공인중개사에게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중개사는 선순위 보증금에 대해 설명할 의무가 있습니다. 비록 집주인에게 물어서 알게 된 내용인 탓에 제약이 있지만 중개업자끼리도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몇번째로 들어간 세입자인지 보증금 총액이 건물시세에 얼만큼을 차지하는지 비교해봐야 합니다.
○ 건축물대장
'정부24' 사이트에 접속해 들어가고자 하는 건물의 건축대장 확인도 가능합니다. 전세자금대출을 받기 위해 필요한 서류이기도 한데, 건축물이 합법적인지 위반사항은 없었는지 확인이 가능합니다. 미리 집주인에게 계약금을 내고 전세 계약을 했는데, 은행에서 건축물대장상 위법사항이 있어 대출이 반려되는 상황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이럴 경우 계약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이 있습니다.
○ 전입신고/확정일자
임대차계약서 작성 후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는 무조건 받아야 합니다. 전입신고는 해당 주소에 산다는 증명을, 확정일자는 보증금을 보호받는 일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불안하다면 '보증보험' 가입
불가피하게 위험을 안고 집을 계약했다면 주택도시보증공사(HUG)와 서울보증보험(SGI)에서 운영하는 전세반환보증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하지만 근린생활시설은 가입이 불가능하고, 다가구주택은 기관에서 보수적으로 평가해 가입 자체가 어렵다는 한계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