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수돗물' 알고도 무대응…원인은 수질검사 기준

입력 2019-06-25 16:43
노후 배수관 문제, 지자체 선제적 대응해야
<앵커>

'붉은 수돗물' 사태가 일어난 지역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수도시설 관리 책임이 있는 지자체가 처음에는 모두 '마셔도 되는 수준'이라며 적극 대응에 나서지 않았던 겁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현장에 답이 있습니다. 신인규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인천에 이어 '붉은 수돗물'이 발생한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입니다. 지난 20일 이곳에서 들어온 관련 민원 가운데 세 건에서 처음으로 수질 이상이 확인돼 비상조치를 취했다고 서울시는 설명합니다.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붉은 수돗물은 이보다 훨씬 전부터 발생했습니다.

문래동에 살고 있는 김은경 씨(가명)가 보여주는 이 서류는 서울시 남부수도사업소에 민원을 넣어 받아낸 수질 검사 결과지입니다.

검사일자는 이 지역에 비상조치가 실시되기 석 달 전인 3월 21일. 김 씨 뿐 아니라 같은 기간 이 지역 다른 집들이 의뢰를 한 서류도 여러 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붉은 수돗물' 민원이 들어온 건데 서울시는 당시 상황을 접수하고도 별다른 대응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보통 한 달 이상 쓰는 수돗물 필터가 검붉게 변색돼 3일마다 바꿔야 할 수준이었지만, 당시 이 지역의 수질 검사 결과는 어느 가구건 모두 '적합' 판정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비상조치에 들어간 지금도, 석 달 전에도 수돗물은 마실 수 없는 수준이라고 주민들은 이야기합니다.

<인터뷰> 김은경 씨(가명) / 서울 영등포구

"(수질검사 적합 판정 이후에도) 안심하지 못했죠. 검사 결과에 대해서 믿음도 없었고, 녹물이 계속 나오니까..."

서울시는 그동안 관련 민원 가운데 수질 부적합 판정이 난 곳이 한 곳도 없었기 때문에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해명합니다.

이같은 대응은 서울시 뿐 아니라 앞서 사태 장기화로 상권 고사 문제까지 불러온 인천시와 같습니다.

'붉은 물 사태'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와 주민 사이에 시차가 발생하는 이유는 현행 수질검사 기준 때문입니다.

서울시는 민원이 들어오면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의 탁도와 염소, 산성도, 철, 구리 등 다섯 가지를 측정합니다.

법적 효력이 없는 간편 검사인데, 최근 연수기나 샤워기 필터 등을 사용하는 가구가 늘어나면서 이 검사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불순물이 필터를 통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현행 검사 기준에는 필터에 나타난 불순물이 무엇인지 살펴볼 이유가 없고, 변색이 되더라도 기준을 충족하기 때문에 적합 판정이 내려진 겁니다.

<인터뷰> 임상진 씨(가명) / 서울 영등포구

"필터는 자기들이 따로 검사를 하지 않고 수질만 검사를 한다고...지금(비상조치 이후)도 그래요. 필터는 검사를 안 하시더라고요."

'마실 수 있다'는 답을 받더라도 검붉은 이물질이 뻔히 나오는 물을 주민들이 안심하고 쓰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장은 취재 중 "빅데이터 분석 등 앞으로 노후수도관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 지역에 선제적인 대응을 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수질 검사 매뉴얼을 강화하고, 민원이 집중되는 지역을 살펴본 뒤 식수 공급이나 수도관 정비 등 조치를 취했다면 서울시 '붉은 수돗물 사태'는 몇 달 전에 조기진화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검사 기준을 책임소재에 대한 방패로 삼는 일보다, 실제 현장을 바라보고 그에 맞는 행정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를 이번 사태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경제TV 신인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