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부터 한 달 넘게 이어진 미국 연방정부의 역대 최장 셧다운(일시적 업무정지) 사태가 일단 해소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의회 지도부는 25일(현지시간) 일시적으로 내달 15일까지 3주간 셧다운 사태를 풀고 정부를 재가동하기로 하고, 이 기간 멕시코 국경장벽 예산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기로 '시한부 정부 정상화'에 전격 합의했다.
이에 따라 지난달 22일 시작돼 이날로 35일째를 맞은 셧다운 사태는 일단 멈추게 됐다. 그러나 셧다운의 원인이 된 국경장벽 예산에 대한 여야 간 간극이 커 기한 내 합의 도출에 실패할 경우 셧다운 사태가 재연되거나 국가비상사태 돌입 수순으로 들어갈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오후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단기 예산안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셧다운을 끝내고 정부 문을 다시 여는 합의에 도달하게 됐다는 걸 발표하게 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서 비상사태 선포를 염두에 둔 듯 "모두 알다시피 내게는 매우 강력한 대안이 있으나 이번에는 쓰지 않기로 했으며, 앞으로도 쓰지 않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의회 인사들로 이뤄진 초당적 위원회가 나라의 국경 안전 문제에 대해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합의된 잠정 예산안은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해온 장벽예산은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장벽예산 없이는 셧다운 종료도 없다'며 마이웨이를 고수해오던 트럼프 대통령이 일단 '빈손'으로 후퇴한 데 대해 미언론들은 "낸시 펠로시(민주·캘리포니아) 하원의장에 대한 항복"(블룸버그 통신), "민주당에 큰 승리를 안겼다"(워싱턴포스트)라고 보도했다.
의회 전문매체 더 힐은 트럼프 대통령이 셧다운 장기화에 따른 혼란에 대한 압박이 가중되자 마지못해 굴복했다"고 풀이했다.
민주당의 하원 장악에 따른 의회 권력의 분점 시대 역학관계의 첫 시험대로 여겨온 이번 셧다운 사태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일단 대선 공약인 장벽예산을 관철하지 못한 채 한발 물러선 상황이 되면서 '트럼프 대 펠로시'의 대결 구도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1패를 한 셈이 됐다.
이번 합의로 여야는 상·하원이 동시에 참여하는 양원 협의회를 구성,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해온 57억 달러 규모의 장벽예산 등 국경 안전 문제에 대한 조율을 진행할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 공화당과 함께 협력함으로써 모두를 위해 진실로 위대하고 안전한 합의를 이뤄낼 수 있다고 본다"며 "장벽이 효과가 있다는 건 상식이다. 우리가 건설하는 장벽은 중세시대의 장벽이 아니라 최전방 국경을 지키는 요원들의 요구사항에 부합하는, 실제로 효과적인 '스마트 장벽'"이라며 장벽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이어 "우리는 진짜로 강력한 장벽을 건설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의회에서 공정한 합의를 이뤄내지 못한다면 정부가 2월 15일에 다시 셧다운에 돌입하거나 아니면 나는 미국의 헌법과 법에 따라 이 비상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권한을 사용할 것이다. 우리는 엄청난 안전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며 셧다운 재돌입 또는 비상사태 선포 가능성을 시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 후 기자들과 만나서는 "우리는 좋은 기회를 갖고 있다. 우리는 민주당과 함께 협력해 협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명백히 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명백히 국가적 비상사태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이번 셧다운 사태로 급여를 받지 못한 연방 공무원들이 하루빨리 월급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과 의회 지도부의 합의에 따라 이날 내로 즉각 상·하원 표결을 거쳐 대통령 서명 절차까지 완료, 임시 예산안의 효력이 발휘하게 된다.
이번 셧다운으로 그동안 15개 정부 부처 가운데 국무, 국토안보, 농림, 교통, 내부, 법무 등 9개 부처가 그 영향을 받았으며, 80만명의 연방 공무원이 급여를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셧다운 사태는 1996년 빌 클린턴 정부 시절의 21일 셧다운 기록을 23년 만에 갈아치우고 연일 사상 최장 기록을 세워왔다.
앞서 미 정치권은 전날 상원에서 '트럼프 타협안'과 '장벽예산 제로(0)'를 담은 '민주당 표 예산안'이 모두 부결된 뒤 접점 마련을 위해 막후 조율을 진행하며 급박하게 움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 합의는 미치 매코널(켄터키)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와 척 슈머(뉴욕)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간 이날 회동에서 이뤄졌다.
당초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는 장벽 건설을 위한 초기집행 예산 반영을 요구했으나 슈머 원내대표는 이를 거부하고 그 대신 국경 안전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예산안 마련을 위한 양원 협의회 구성과 셧다운 종료를 위한 임시 예산안 통과를 역제안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보도했다.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는 이 안을 백악관으로 가져가 막판 조율을 진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여야 상원 원내대표 간에 수차례 전화통화가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의 최종 발표문 문안이 나오기까지 슈머 원내대표가 직접 백악관과 조율을 진행했다고 CNN방송은 보도했다.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은 장벽 예산 편성 입장을 고수하며 '국가 비상사태 선포' 카드까지 꺼내 들며 민주당을 압박했으나 민주당이 이에 '장벽예산 제로(0)' 지출법안 하원 처리로 맞불을 놓는 등 강 대 강 대치가 이어져 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9일 백악관에서 한 대국민 연설을 통해 의회가 멕시코 국경장벽 건설 예산 57억 달러를 통과시켜주면 '다카'(DACA·불법 체류 청년 추방 유예 프로그램)를 3년 연장하겠다는 내용의 '빅딜' 타협안을 제안했지만, 민주당은 즉각 '수용 거부' 입장을 밝혔다.
이 과정에서 펠로시 하원의장이 셧다운 사태가 해소되기 전에는 매년 하원회의장에서 상하원 합동 연설 형태로 진행해온 대통령 국정 연설을 승인할 수 없다고 맞서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일단 '셧다운 해소 후 국정 연설' 쪽으로 가닥을 잡은 상태였다.
장벽예산 요구가 수용되기 전까지는 물러설 수 없다며 '셧다운이 수년간 이어질 수 있다'고 배수의 진을 쳐온 트럼프 대통령이 전격 민주당과의 타협 쪽으로 돌아선 데에는 최근 지지율 하락과 이에 따른 여당인 공화당 내 여론 악화 등에 따른 부담을 포함, 갈수록 압박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장 무급 근무상태 장기화에 따른 항공교통 통제 요원 부족으로 인해 항공대란이 현실화화는 조짐이 빚어진 것도 부담이 됐다고 미언론들은 보도했다.
이와 함께 셧다운으로 인해 일단 무산된 '29일 국정 연설'을 다시 본궤도에 올리기 위한 차원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오랜 친구이자 대선 기간 '비선 참모'로 활동한 로저 스톤이 '러시아 스캔들'을 수사하는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팀에 의해 전격 체포되는 등 점점 코너로 몰리는 상황에서 국면전환용 포석도 깔려 있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