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가 부도의 날’ 관객몰이…한국 부도 재발 가능성은- [국제경제읽기 한상춘]

입력 2018-12-17 09:25
수정 2018-12-17 09:33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이 개봉한 지 16일 만에 3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일부 논란은 있지만 대중 영화인 만큼 몇몇 장면의 사실 여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보다 이번 영화가 화두를 던진 것 처럼, 한국이 20년 전과 같은 '국가 부도’ 상황을 다시 맞이할 가능성은 없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선 국가부도가 어떤 상황을 말하는지 개념부터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는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지만 국가 부도는 재정 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재정의 건전성을 나타내는 국내총생산(GDP)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따진다면 한국은 21년 전이나 지금이나 신흥국 위험수준인 70%보다 훨씬 낮다.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국가 부도는 재정 위기가 아닌 '외환 위기'를 말한다. 당시 한국의 외환 보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도 했지만 나라 밖에서는 위기가 곧 닥친다고 경고하는데도 경제 각료는 ‘펀더멘털(경제기초여건)이 괜찮다’는 안이한 경기진단과 부처 간 갈등, 미숙한 대처가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데 초점을 맞춰 이 영화는 전개되고 있다.

◇ 외환위기 당시 상황 : 미국 최장기호황…'슈퍼 달러' 시대

외환위기 당시 우리나라 안팎의 상황을 보면 미국과 다른 국가 간 따로 노는 ‘대발산(Great Divergence, GD)’이 시작됐다. GD가 시작됐던 1994년 이후 미국 중앙은행(Fed)은 정책금리를 3.75%에서 4.25%로 인상한 이후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이를 6%까지 올렸다. 같은 시점에 독일의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는 정책금리를 5%에서 4.5%로 인하했다. 일본은행(BOJ)을 비롯한 미국 이외 선진국 중앙은행도 금리를 내렸다.



1995년 4월에는 일본 경제를 살리기 위한 ‘역(逆)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 강세를 용인하는 ‘루빈 독트린’ 시대가 전개됐다. 루빈 독트린이란 당시 로버트 루빈 미국 재무장관이 달러 강세가 자국의 국익에 부합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전개됐던 슈퍼 달러 시대를 말한다. 루빈 독트린으로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79엔에서 148엔까지 급등했다.

미국 경제도 견실했다. 빌 클린턴 정부 출범 이후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정보기술(IT)이 주력산업으로 부상하면서 ‘신경제(New Economy) 신화’를 낳았다. 경제 위상도 높았다. 그 결과 ‘외자 유입→자산 가격 상승→부(富)의 효과→추가 성장’ 선순환 고리가 형성되면서 세계대전 이후 최장의 호황기를 누렸다.

이 과정에서 신흥국은 대규모 자금이탈에 시달렸다. 1994년 중남미 외채위기,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1998년 러시아 국가채무 불이행 사태까지 이어지는 신흥국 위기가 잇달아 발생(일명 그린스펀·루빈 쇼크)했다. 미국도 슈퍼 달러의 부작용을 버티지 못하고 2000년 이후에는 ‘IT 버블 붕괴’라는 위기 상황을 맞았다.

◇ 미국만 따로가는 '대발산', 21년만에 다시 시작

이러한 '대발산(GD)' 현상이 다시 시작됐다. Fed는 출구전략의 일환으로 2014년 10월말 양적완화를 종료하고 이듬해 12월부터 금리를 인상했다. 출구전략이란 금융위기로 흐트러졌던 비정상 국면을 정상 국면으로 돌려놓는 것을 말한다. ‘푸는 것’보다 ‘회수하는 것’이 더 어려운 통화정책 관행을 감안하면 또 하나의 험난한 길이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중앙은행(ECB)는 마이너스 금리 폭을 확대하고 양적완화 시한을 연장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추가 금융완화책을 보완하겠다는 의사도 빼놓지 않았고 그 후 필요할 때마다 실행에 옮겨왔다. 아베노믹스(아베 정부의 경제정책)에 한계를 느낀 일본은행(BOJ)도 마이너스 금리제도를 도입해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Fed와 ECB(다른 선진 중앙은행 포함)는 실물경제 여건의 차이가 없을 때 동일한 통화정책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세계 경제와 국제금융시장의 안정을 기하기 위한 묵시적인 합의 때문이다. Fed와 ECB가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은 1994년 이후 21년 만에, 1999년 ECB 설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21년 전과 마찬가지로 미국 경제도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2009년 2분기 이후 지속돼온 회복세가 내년 상반기까지 지속될 경우 1990년대를 뛰어넘는 전후 최장의 호황기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 예측기관은 내년 성장률을 2%대로 둔화될 것으로 보고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대선’을 앞두고 유일하게 버팀목이 될 경기를 부추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정부의 달러 정책 기조도 바뀌었다. 지난 3월 래리 커들러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 취임 이후 미국은 강달러로 정책을 바꿨다. 신흥국 입장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제2 루빈 독트린’을 연상케 할 ‘커들러 독트린’ 시대가 전개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달러 가치는 ‘머큐리(Mercury)’로 표현되는 펀더멘털 요인과 ‘마스(Mars)’로 지칭되는 정책 요인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올해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할 국가가 많을 정도로 신흥국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 3월 Fed의 금리인상 이후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국가, 6월 Fed의 금리인상 이후 터키 등 중동 국가, 9월 Fed의 금리인상 이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신흥국의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기대해 볼 것은 Fed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게임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Fed가 추가로 금리를 올려 ‘슈퍼 달러’ 시대가 전개되면 미국과 신흥국 모두에게 최악의 시나리오가 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처럼 슈퍼 달러 시대를 초래했던 대발산(GD)이 더 확대되지 않도록 금리인상 속도를 조절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 해외에서 한국경제 '비관론' 쏟아지는 이유

현재 우리 외환보유액은 충분하다.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는 2선 외화(캐나다와 맺은 상시 통화스와프 제외)까지 포함한다면 5,300억 달러가 넘는다. 21년 전 외환위기가 발생할 당시 외환보유액인 300억 달러보다 무려 17배 이상 늘어났다. 가장 넓은 의미의 캡티윤 방식에 의한 적정외환보유액인 3,800억 달러보다도 훨씬 많다. 하지만 우리 경제 앞날과 관련해 경착륙, 중진국 함정, 샌드위치 위기, 일본형 복합 불황, 베네수엘라 사태 등 안팎에서 각종 비관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국민 90% 정도가 경기가 침체되고 있다고 공감하고 있는데 반해 정책 당국은 최근까지 경기 회복 입장을 고수해 왔다. 마치 21년 전 외환위기 당시 경제 각료가 보여준 펀더멘털론과 비슷하다.

한국을 바라보는 해외 시각도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이달 초 크리스토프 하이더 주한 유럽상공회의소(ECCK) 사무총장은 ‘한국 경제가 갈라파고스 함정에 빠지고 있다’고 작심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갈라파고스 함정이란 중남미 에콰도르령(領)인 갈라파고스 제도가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1000km 이상 떨어져 있는 것에 빗대 세계 흐름과 격리되는 현상을 말한다.



일부 경제 관료들은 영화가 사실과 다르다는 이유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 모리스 골드스타인의 위기판단지표, 골드만삭스의 외채상환계수 등으로 평가해 보면 국가 부도(외환위기)가 재발할 가능성은 낮게 나온다. 그러나 ‘국가 부도의 날’에 관객이 몰리고 불안해하는 것은 21년 전과 마찬가지로 정책 당국의 안이한 경기진단과 대처 그리고 부처 간 갈등이 마치 데자뷰를 보듯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현 정부 출범 초기 정책을 만들었던 1기 경제팀은 국민들의 정서를 외면한 채 경제정책과 운용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삶은 개구리 신드룸(boiled frog syndrome)’처럼 위기를 인식했을 때 손 쓸 방법이 없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수장으로 출범한 2기 경제팀이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한상춘/한국경제신문 객원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