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흙수저 출신에서 한국 경제를 일으켜세운 왕회장이 되기까지 불꽃같은 인생이 눈길을 끈다.
1915년 가난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난 정주영 회장은 강원도 통천소학교 출신이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 소학교 졸업 후 원산, 금화, 경성, 인천 등 도시로 가출해 막노동으로 인생을 익히며 삶을 개척한다.
청년 시절 정주영 회장은 일생을 걸 만한 사업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하던 쌀가게의 단골손님이 서울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 공장의 직공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아현동에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이 있는데, 그걸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시를 받게 된다.
자금이 넉넉하지 않았던 정주영 회장은 이곳저곳 발품을 팔아 빚을 내 ‘아도서비스’를 계약한다.
몇 년 후 정주영 회장은 자동차 수리 공장을 다시 시작했으며, 이때 내건 간판이 ‘현대자동차공업사’다. ‘현대’를 지향해서 발전된 미래를 살아보자는 의도에서였다고.
1947년 정주영 회장은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 내부에 ‘현대토건사’를 세워 건설업도 시작했다. 1950년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 사옥을 필동으로 옮겨 현대건설주식회사로 출발하게 된다.
현대그룹의 토대가 된 현대건설은 6·25 이후 복구 사업을 통해 큰돈을 벌게 된다.
현대건설의 중동붐을 바탕으로 현대그룹은 조선·전자·중화학·금융업 등 거의 모든 업종에 진출해 현대그룹을 성장시킨다.
정주영 회장은 산업 현장이나 세계 어디에서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밝혔던 것으로 유명하다.
가족과 회사 임직원은 물론이고 고위 경제관료, 세계은행 관계자 등 모든 이들의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허무맹랑한 상상으로 치부됐던 그 모든 일을 “이봐, 해보기나 했어?”라는 한마디와 함께 도전에 옮겼다.
다른 기업들은 엄두도 못 내는 사업들을 과감하게 추진하고 성공시킴으로써 한국경제 산업화의 물꼬를 튼 인물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 규모였던 주베일 항만 공사, 조선업 진출을 위해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들이밀며 투자자를 설득한 일화는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사진 TV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