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줌인] KB금융 노동이사제로 본 국민연금의 아유구용(阿諛苟容)

입력 2017-11-22 13:43


중국 전국시대에 조(趙)나라 기둥이던 염파(廉頗)는 수많은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대장군에 오른 명장이다. 염파가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땅과 재물이 넉넉해 전국에서 식객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한번은 그가 진(秦)나라와의 일전(一戰)에서 왕의 오해를 받아 벼슬에서 쫓겨났다. 그러자 식객들이 모두 떠나버렸다. 얼마 후 염파가 재등용되자 뿔뿔이 떠났던 식객들이 다시 몰려들어 전처럼 그에게 아유구용(阿諛苟容)했다.

앞의 이야기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의 ‘염파 인상여 열전(廉頗 藺相如 列傳)’에 실려 있는 일화다.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아유구용이다. 아유구용은 남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알랑거리고 비위를 맞춘다는 의미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지조 없이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는 행동에 쓰이는 말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불공정 합병에 찬성한 국민연금이 이번에는 KB금융 노동이사제에 찬성표를 던졌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국민연금의 ‘정부 거수기’와 같은 행보에 ‘아유구용’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노동이사제가 대통령의 공약사항으로 국민연금이 정권 코드 맞추기를 했다는 것이다. 앞서 박근혜 정부에서 삼성물산 불공정 합병에 손들어준 대가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이 재판을 받고 있다.

이날(20일) 주총에서 노동이사제 찬성률은 KB금융 의결권 발행 주식의 총수 대비 13.73%, 출석 주식수 대비 17.74%에 불과해 도입이 무산됐다. 안건이 통과되려면 의결권 주식 수의 25% 이상, 출석 주주의 과반 이상 동의가 있어야 한다. 국민연금이 도마 위에 오른 또 다른 이유는 “기금 운영 결정 과정의 투명성과 독립성을 강화하겠다”던 다짐과 달리 폐쇄적인 의사결정과정이 되풀이 됐기 때문이다.

KB금융 ‘노동이사제’에 대한 국민연금의 찬성 결정은 삼성물산 때와 마찬가지로 외부전문기구의 의견을 배제한 채 내부 투자위원회가 결정했다. 밀실 의사결정이다. 이미 국내외 여러 의결권자문기구에서 반대 의견을 밝힌 상황이었다. 이 같은 사전투표 결정은 비공개에 부쳤고 찬성 결과가 알려지자 부랴부랴 해명자료를 배포했다. 논란을 의식했던 것일까. KB금융 주총장에 국민연금 관계자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세계 3대 연기금이자 KB금융의 최대주주(9.68%)로서 문제해결 방식 치고는 아쉬움이 남는 모습이다.

국민연금의 해명내용 역시 부족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KB노조가 주주제안한 사외이사 선임 건은 제안자가 누구냐와 상관없이 사외이사 선임 건”이라며 “사외이사 선임과 관련한 통상적인 의결권 행사지침을 따랐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사외이사 선임건이 아니라 앞서 수차례 보도를 통해 사회적인 파장이 충분히 예상되는 사안이었다. '기금운용본부가 찬성 또는 반대하기 곤란한 안건은 전문위원회에 결정을 요청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또 국민연금은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의 ‘찬성 권고’가 결정의 근거가 됐다고 주장했지만,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측은 국민연금의 의결권지침에 따른 찬성이었다고 설명했다. 쉽게 말해 ‘내 기준대로 네가 판단해달라’는 건데 요즘 말로하면 ‘답정너(답은 정해져있고 너는 대답해)’ 상황인 것이다. 국민연금 의결권행사지침상 사외이사 선임 안건에 대한 판단 기준은 경영진 제안과 주주제안 구분 없이 법령상 결격사유, 과도한 겸임, 기업가치 훼손(주주권익의 침해) 이력, 당해 및 계열회사 최근 5년 이내 상근 임직원, 이사회 참석률 75% 미만, 10년 연임 초과, 자문계약 체결 등 회사와의 이해관계 여부로 정해놓고 있다.

우려는 이번 사례가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은 우리나라 대표기업들의 최대주주이거나 2대주주이고 5% 이상 지분을 확보한 곳만 275곳에 이른다. 당장 KB금융 노조 측은 내년 3월 정기주주총회에서 같은 안건을 수정해 다시 상정하기로 했다. 국민연금 측은 “다음번에도 지침의 수정 없이 이번과 같이 판단하겠다”는 방침이다. KB노협은 이번에 지분 0.18%를 모아 주주제안 안건을 올렸다. 금융회사의 주주제안은 지분 0.1%이다. 현재 금융사별 우리사주지분은 우리은행 5.31%, 신한금융 4.70%, 하나금융 0.89%이다. CEO인사시기가 맞물려 있는 만큼 이들 금융사 노조도 내년 정기주주총회에서 비슷한 요구를 할 공산이 크다. 일각에서는 이러다가 ‘연금 사회주의’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이다. 국민연금은 아유구용(阿諛苟容) 행태에서 벗어나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