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것 같아서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술 한잔 걸치고 어지럽게 펼쳐진 네온사인 불빛 사이를 거닐면 가슴 한쪽을 후벼 파는 가사와 멜로디가 귓가를 지나 온몸을 감싸며 발걸음을 멈추게 하던 때. 그래서 그 노래를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으며 울고 울다 문득 떠오르는 누군가 때문에 수화기를 들고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아티스트 한 명이 올해 4월 새롭게 돌아왔다.
이것은 아티스트 '에스더(본명, 한애스더)'의 이야기다.
# 오랜만에
내가 기억했던 에스더는 말괄량이, 천방지축에 제멋대로인 왈가닥 소녀였다. 그런데 인터뷰 날, 오랜만에 만난 그는 어느새 차분한 여인으로 변해있었다. "안녕하세요. 5년 만에 돌아온 가수 에스더입니다"라고 말하며 은은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에스더는 과거와는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올해 4월 발표한 에스더의 신곡 '울 것 같아서 그래' 에서 어느 때보다 성숙해진 에스더의 음성에 놀랐던 일이 떠올랐다. 쉼 없이 음악에 매진해오며 변화를 시도하고 고민해온 그녀의 흔적 때문이었던 걸까. 그녀에게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걸까.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 과거, 왜 우리는 에스더를 그리워했나
에스더는 1997년, 19세의 나이로 그룹 소호대 멤버로 가요계에 데뷔해 잔잔하고 애절한 명곡 '돌이킬 수 없는 사랑'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며 사랑받았다. 이후 에스더의 실력을 높이 평가한 기획사의 조치에 따라, 솔로로 전향해 '뭐를 잘못한 거니', 임재범의 '너를 위해' 의 원곡인 '송애(送愛)'등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당대를 울리는 주옥같은 발라드 명곡들을 남겼다. 사랑해본 이라면 그녀의 노래 가사에서 공감할 수 있을 만한 구절 하나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이후 2010년 '사랑이 변하니'라는 곡을 발표했고, 2012년에는 하하가 피처링한 곡 '너 따위가'로 활동했다. 이후 종적을 감췄다가 올해 4월, 5년여 만에 새 앨범을 선보인 것이다. 오랜만에 돌아온 에스더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건강이 안 좋아지기도 했고, 아이를 낳은 후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시점이 왔어요. 오랫동안 활동하며 익숙해져 있던 창법도 바꾸고, 초심으로 돌아가서 준비했어요. 결과를 떠나서 변화를 통해서 마음을 비우자는 시도였죠."
<복면가왕>(2015~, MBC), <슈가맨>(2015~2016, JTBC)에 출연했던, 방송 활동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었다. "요즘 후배들은 음악도 방송도 정말 잘해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요즘 방송은 이렇구나'하고 변화를 피부로 느꼈죠. 처음엔 연예계 경력을 믿고 중간은 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자만이었어요. 긴장감 때문에 재량을 펼치지 못했던 점도 아쉬웠어요." 덤덤하고 솔직한 목소리다.
에스더와 내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 과거에는 듣고 싶은 음악이 있을 때면, 이태원을 누비며 발품을 팔았다. 그렇게 어둠의 경로를 통해야만 해외 뮤지션들의 카세트테이프나 LP 등을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요즘에는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면 전 세계의 온갖 음악과 동영상을 접할 수 있으니, 듣고 보고 자란 것에서 우리와 차이가 나는 2010년대의 뮤지션들의 감각은 놀라울 만하다. "현재 신인들의 감각은 정말 대단해요. 그렇지만 아날로그 세대의 뮤지션들이 가지고 있는 애환은 흉내가 안 되지 않을까요. 그건 습득이 아닌 경험에서 나오는 거니까." 에스더의 차분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누군가를 대변하듯이.
# 현재, 따뜻한 울타리로
방황도 많았고 여러 갈래 길에서 고민하고 상처받았던 그녀를 바로 잡아준 건 다름 아닌 결혼과 종교였다.
에스더가 활동하던 시절은 연예기획사와 뮤지션 사이의 노예계약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어린 나이에 원하는 대로 음악 활동을 펼칠 수 없었던 분노와 억울함이 있었어요. 안 좋은 생각을 하던 시절이었죠" 에스더의 방황하던 청춘은 교만하고 제멋대로인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그런 젊은 시절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 것은 바로 가족들과 종교였다. "무절제했던 인생을 돌아보게 된 것은, 사랑하는 이들이 저 때문에 상처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어요" 그렇게 에스더 인생의 제2막이 열렸다.
결혼생활과 남편에 대해서 에스더는 입을 열었다. "듬직해요. 직업은 그래픽 디자이너인데 일에 정말 철저해요. 자유로운 생각을 해야 하는 직업인 면에서 서로 통해요. 수많은 사람 중에 '아, 정말 사랑하는 남자는 이런 거구나' 하는 걸 처음으로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에요. 종교도 같아서 제가 힘들 때 같은 방향을 보고 걸을 수 있도록 저를 잡아주는 사람이죠.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항상 있어요." 에스더의 남편, 김주황 씨는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다. 에스더의 이번 싱글 앨범의 재킷을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가치관과 종교가 통하는 배우자는 이상적인 삶의 동반자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독자들이 간과해서는 안 될 소문이 머릿속에 스쳤다. "흠. 가치관도 중요하지만. 여섯 살 연하에 훈남이면, 싸우다가도 사랑이 싹틀 것 같은데요." 슬며시 던진 나의 농담 사이로 에스더는 웃으며 눈을 흘긴다.
누군가에게는 삶을 지탱해주는 끈이 될 수도 있는 종교에 대한 에스더의 생각은 누구보다 뚜렷했다. "가족들이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예요. 어려서부터 '교회 가라'라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강요하니까 더 가기 싫었어요. 그때는 친구들을 만나거나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풀었죠. 근데 정말 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고 힘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더라고요. 지금은 가족을 빼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의미가 됐죠. 먼 길을 돌고 돌아서 원래 있어야 했던 자리로 온 기분이랄까" 회상에 젖은 듯 멈칫하던 그녀는 이야기 도중 돌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아무에게도 못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위로를 내어줄 수 있는 종교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임을 알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그리고 미래, 에꼬레떼르 (Eecco Letter)
"이번에 동탄에 개인 작업실을 냈어요. 덕분에 앞으로 더 많은 음악을 들려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데뷔 때처럼 설레고 행복해요" 에스더는 오는 9월 30일, 홍대 레드빅 스페이스에서 열리는 콘서트 '에꼬랜드(Eccoland)'를 준비하고 있다. 에스더는 그룹 '에꼬레떼르'로 1년 4개월 만에 라이브 콘서트 무대에 선다. 에꼬레떼르(Eecco Letter)는 에스더와 크루 제이든, 브롤리가 2016년 결성한 뮤직레이블이다.
에스더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음악과 목소리로 지쳐있는 사람들의 일상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는 이들의 공연이 설레도록 기다려진다. 5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한 남자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로 돌아온 에스더의 더욱 깊어진 목소리가 몇 년 전 그때처럼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달래주길 바란다.
진행 PK헤만(가수&래퍼) | 기획· 편집 권영림
티비텐플러스 <PK헤만의 라이브칼럼 A3 : All About Artist >에서는 매주 개성 넘치는 '아티스트(여기서 아티스트란, 창작 또는 표현 활동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넓은 의미의 종합예술가를 칭함)'를 라이브 생방송에 초대합니다. <PK헤만의 라이브칼럼 A3 : All About Artist > 라이브 방송과 VOD 콘텐츠는 구글 플레이 스토어에서 '티비텐플러스(TV10plus)' 앱을 다운로드해 시청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