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는 물론 할리우드도 사랑한 액션 배우 '이병헌' 그래서일까? 그를 떠올리면 이런 장르가 먼저 생각난다. 액션, 범죄, 스릴러 같은 것들. 하지만 지금의 '갓'병헌을 키운 건 굵직하고 터프한 것들이 아니라 부드럽고 섬세한 작품들이다.
'내 마음의 풍금'에서는 풋풋한 감성을,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해 여름'에서는 첫사랑의 아련함을 완벽하게 그려낸 그다. 이런 이병헌을 그리워하는 관객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될 만한 작품으로 그가 스크린을 다시 찾았다. 한동안 몸을 쓰던 이병헌이 이번에는 총과 칼을 내려놓고 10여 년 만에 감성 영화로 돌아왔다.
증권회사 지점장으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안정된 삶을 살았던 남자가 있다. 남은 가족을 호주로 보내고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던 그는 부실채권사태로 회사가 망하자 가족에게 돌아가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이병헌은 기러기 아빠 강재훈으로 분해 한 가정의 가장이 짊어지게 되는 삶의 무게를 깊이 있게 담아냈다. 오로지 성공만을 바라보던 한 남자가 삶의 모든 것이라 믿어왔던 가치가 무너져 내렸을 때 마주하는 암담함을 이병헌은 담담하고 차분하게 그려낸다.
영화의 90% 이상의 분량을 책임지는 이병헌이지만 대사도 거의 없고 큰 움직임도 없다. 그는 절제된 연기로 더 절절한 감정선을 끌고 간다. 오로지 그의 눈빛만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극에 몰입하게 된다. 최근 그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병헌은 연기로는 절대 까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 내 역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한발 떨어져서 읽으면 인물 하나하나가 입체화되고 형상화되는 게 있다. 그러다 보면 '그 인물이 어떤 인물이겠다'는 게 감이 잡히고 감이 안 잡히면 내 나름대로 추론하고 상상해서 만들어낸다. 모든 인간을 한두 가지 성격으로 규정지을 수 없지 않나. 여러 성격이 다 있는데 그걸 끄집어내야 한다.
이병헌에게 연기란 무엇인가.
연기생활을 오래 해왔지만 여전히 '내가 정말 연기에 관해 얘기할 수 있나' '내가 정말 배우가 맞나'라는 의심을 한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서 연기는 가족을 제외했을 때 내게 가장 큰 부분이다.
'내부자들'이나 '마스터'도 그렇고 파멸하는 캐릭터를 맡았는데, 차기작인 '남한산성' 같은 경우도 파멸과 연관이 된 거 같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들어보니 그런 공통점이 있다. 그런 종류의 시나리오가 많은 게 아닐까. 드라마틱한 것들을 선호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완전히 다른 장르 영화에 출연할 의향은 있는지.
100% 코미디는 겁이 난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는 영화를 좋아하긴 한다. '내부자들'처럼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것들, 블랙코미디라든가 휴먼드라마가 좋다.
몇 년간 쉬지 않고 일을 해왔다. 촬영을 연달아 하다 보면 캐릭터에 몰입하고 빠져나오는 과정이 힘들 것 같은데.
사실 캐릭터에서 벗어나기 힘들어하는 유형의 배우는 아니다. 물론 '내부자들' 촬영 이후에는 자꾸 사투리가 나오더라. 이후 '마스터' 촬영 중에 감독님이 이유 없이 NG를 내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내가 사투리를 썼다고 해서 놀랐다. 그저 나를 너무 소진하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든다.
20년 넘게 연기를 하면서 영화계나 본인이나 변했다는 걸 느끼나.
우리나라 영화계가 할리우드와 비슷해지고 있다. 영화가 가진 의미보다는 숫자로 판단하는 게 슬픈 일인 것 같다. 12시간 노동을 칼같이 지키는 것도 엄청난 변화다. 촬영장 시스템이 많이 변한 것 같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촬영장에 들어가야 했는데 어느 순간 모두가 다 나한테 인사를 하고 있더라. 영화 스태프들이 갑자기 어려진 것 같다. 배우가 감독을 하고 감독이 배우를 하는 걸 봤을 때도 할리우드와 닮아가는 느낌이 든다.
연출해볼 생각은 없나.
능력이 된다는 판단이 생기면 하고 싶다. 하고 싶은 마음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같이 따라가는 것 같진 않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보면 부럽다. 생각을 행동에 옮기는 것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쉽지 않을 텐데. 누구나 생각은 하지만 이행하는 건 힘든데 대단하다.
영화를 만든다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는지.
구체적인 건 없지만 만약에 이야기를 만들게 된다면 막연하지만 판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왜 판타지인가.
약간의 판타지가 들어간 걸 좋아한다. 판타지 요소가 너무 많이 들어간 것 말고. '번지점프를하다' 수준이 좋다.
드라마에는 출연할 생각 없나. 김태희와 함께 출연한 '아이리스'에서 정말 좋았다.
영화와 드라마를 모두 해봤기 때문에 기회가 생기면 거부감없이 할 생각이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