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이후 곳곳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7일에도 심신이 고달픈 하루를 보냈다.
반 전 총장은 이날 오전 경상남도 김해의 봉하마을을 찾은 데 이어 오후에는 전라남도 진도의 팽목항을 방문했다. 봉하마을에선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했고, 팽목항에선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에게 분향했다.
'노무현'과 '세월호'로 상징되는 진보 진영을 끌어안으려는 시도였다. 전날 경남 거제와 부산을 방문한 데 이어 이날 전남 영암을 찾음으로써 영·호남 통합 메시지를 주려 한 것으로도 해석됐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동지'인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와 대립하는 탓에 '친노(친노무현) 성지'로 불리는 봉하마을 입구에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등의 항의 시위에 직면했다.
반 전 총장이 노 전 대통령 묘역으로 향하는 길에 이들이 내건 현수막은 "배신자라 않겠다. 잘 왔다 반기문", "배은망덕 기름장어, 봉하마을 지금 웬일?" 등 비난 구호로 가득했다.
반 전 총장 측은 자신을 두고 '노무현을 배신했다'는 지적에 해명자료를 내며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외교통상부 장관과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발탁된 각별한 인연을 잊지 않았다는 게 요지다.
반 전 총장 측은 "개별 회원국 국가원수들의 취임식이나 장례 행사 등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오랜 관례"를 깨고 "노 전 대통령과의 각별한 관계를 감안해 처음으로 장의위원회에 참여했다"고 소개했다.
2011년 12월에는 방한 중 봉하마을을 방문했으며, 부인 권양숙 여사에게도 매년 초 신년 인사를 하고 한국에 올 때마다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했다는 것이다.
반 전 총장은 이날 권 여사를 예방해 "노 전 대통령의 유업을 기리도록 하겠다"고 말했으며, 이후 기자들에게 "노무현 대통령께서 정치교체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도 아직 우리 가슴 깊이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자신이 내세운 '정치교체'가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이상과 일맥상통한다는 의미다.
봉하마을을 떠난 반 전 총장은 팽목항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반 전 총장은 반대시위에 부딪혔다. 전날까지 가는 곳마다 꽃다발과 지지 구호를 들었던 반 전 총장으로선 하루 만에 '가시밭길'을 걸은 처지가 됐다.
반 전 총장 측이 시위대와의 충돌을 피하려고 '연막작전'을 펴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 퇴진 진도운동본부' 등 진보성향 단체 회원들이 '반기문 반대' 시위를 하려고 모이자 한 참모가 반 전 총장 도착 직전 이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한 것이다.
시위대를 따돌린 반 전 총장은 분향소에서 '기습 분향'을 하고 실종자 가족들과 면담했지만, 이후 팽목항을 떠날 때까지 반 전 총장 측과 시위대는 같은 공간에 머무르면서 긴장감이 흘렀다.
반 전 총장에 대한 항의 시위가 진보 진영과 호남 민심을 고스란히 반영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합리적 진보 진영'까지 아우르면서 호남을 껴안겠다는 반 전 총장 측의 구상을 실현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