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진국 함정, 넛 크래커, 샌드위치 위기, 일본화, 잃어버린 10년…. 한국 경제 앞날에 대한 경고음이 잇따르고 있다. 올해 성장률 전망치도 2%대로 크게 후퇴했다. 일자리, 자본, 생산성이 동반 위축되는 ‘3퇴 현상’으로 지속 성장 가능성을 알 수 있는 잠재성장률도 3% 내외로 주저앉았다.
성장률 전망치와 잠재성장률이 떨어지는 요인도 복잡하다. 중국 경기둔화, 미국 금리인상 등의 대외요인에다 구조조정 지연, 국회와 각종 단체(노조 포함)의 이기주의 등 대내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변수를 통제변수와 행태변수로 나뉠 때 통제 가능하지 행태변수가 많아 한국 경제 앞날을 더 어둡게 한다.
나라 안팎에서 한국 경제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한창이다. 그 중에서 우리 경제에 대해 비교적 밝은 해외기관일수록 ‘4?13 총선 이후 한국 경제가 더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는 평가가 고개를 들면서 재차 불거지고 있는 ‘한국 경제 위기론’과, 과연 박근혜 정부가 이런 위기론을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처럼 위기 경험국의 위기극복 정도를 평가하는 데에는 ‘위기 3단계론’이 적용된다. 특정국 위기는 외화 등에 금이 가면서 유동성 위기가 발생한다. 유동성에 문제가 생기면 담보 관행이 보편화된 국가일수록 경제시스템 위기로 비화되고, 실물경제 위기로 치닫는 것이 이 이론의 골자다.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도 이 수순을 거쳐야 한다.
위기 경험국은 유동성 위기를 해결한 후 시스템 위기를 극복하는 단계로 순조롭게 이행하지 못했다. 한국도 외화 유동성을 확보한 이후 잦은 정책변경, 정부 혹은 정책에 대한 신뢰 부족 등으로 시스템 위기 극복이 지연되는 과정에서 실물경기 회복이 완전하지 못한 채 20년이 지났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시스템 위기와 실물경기 위기극복이 지연되면 될수록 각종 착시현상에 따른 투기 요인이 커지는 대신 위기 불감증에 따라 대처능력이 약화된다는 점이다. 이때 투기 요인이 차익 실현으로 연결될 경우 극복했다고 봤던 유동성 위기가 다시 발생한다는 것이 ‘위기 재귀론’이다.
현 정부 출범 이후 경제 안정성이 계속 흔들리고 위기론이 가시지 않는 것은 ‘통계수치의 위기’가 아니라 경제입법과 정책운용체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시스템의 위기?에 연유된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경제 안정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경제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부터 선행돼야 한다.
현실진단을 토대로 경제 시스템을 안정시킬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특히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수출이 세계경제 환경이나 환율이 조금만 불리하게 되면 크게 감소돼 곧바로 위기감이 닥치는 소위 ‘천수답 구조’를 ‘수리안전답 구조’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땜질식 단기 처방은 금물이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와 마찬가지로 현 정부도 4?13 총선과 내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의식해 경제우선 정책을 예산조기집행과 같은 단기 처방에 의존할 경우 고질병인 ‘고비용-저효율’ 문제를 개선하는 일은 요원해 진다. 오히려 구조조정 노력을 지연시킴으로써 후손이 부담해야 할 사회적 비용은 엄청나게 늘어난다.
기업에게도 우리 경제 내에서 안정된 경영활동을 보장하고, 해외 진출한 기업도 국적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이 개혁정치이든 산업정책이든 간에 정책의 일관성과 명확한 기준이 전제돼 시행해야 한다. 규제 완화를 추진하면서 기득권 때문에 핵심규제 사항을 풀지 못하거나, 특정기업에게 막대한 이권이 보장되는 신규 사업을 허가해 주면서 뒷거래가 오가는 식의 뒷맛이 가시지 않는 정책이 계속될 경우 위기감만 키울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우리 기업의 ‘무국적화’를 촉진하고 산업공동화와 실업증대 등의 엄청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기업도 경기가 좋을 때에는 한탕하고 경기가 나쁠 때에는 정부의 지원을 바라는 ‘화전인식 경영’은 지양해야 한다. 정치권과 정책당국이 실망스럽다하더라도 지속 가능한 성장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투자는 의무다.
국민에게도 경제현실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과 안정된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 주는 것도 시급하다. 법규이든 사회규범이든 간에 정책당국이 마련하는 대로 쫓아가더라도 고위층에서 뇌물이다 떡값이다 해 부정부패가 발생할 경우 국민은 상대적인 박탈감과 허탈감에 휩싸여 위기감을 낳게 하는 원인이 된다.
정부가 실시하는 정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는 발상의 대전환도 필요하다. 갈수록 국민이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해 무조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정책당국(정치권의 책임이 크다)이 국민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올바르게 국정을 운영하지 못한 측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6월 금융통화회의에서 정책금리가 1년 만에 0.25% 포인트 기습적으로 내렸다. 중요한 것은 어렵게 내린 만큼 의도했던 정책효과를 거둬야 한다. 구조조정 재원 마련 차원의 ‘부채 화폐화(debt monetization)’로 우려되는 한국은행 독립성 훼손 방지를 위한 면피용 조치라면 이번 조치에 대한 비판이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금리인하 효과를 거두기 위해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안이 추가적으로 금리를 내리를 일이다. 6월 금융통화회의에서 한꺼번에 두 단계, 0.5% 포인트 내렸어야 했었다는 아쉬움과 함께 7월 회의에서는 한 차례 더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시장 참여자 사이에도 추가 금리인하 방안에 대해 의외로 빨리 공감대가 형성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반대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가계부채가 과다한 상황에서 금리를 내리더라도 더 이상 차입할 여력이 없어 오로지 가처분소득이 늘어나야 소비가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이 반대론자의 논거다. 가계부채가 경제현안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2003년 이후 가처분소득과 소비 간 상관관계를 추정해 보면 ‘0.9’ 이상 나와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금리인하 효과에 대한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화정책 전달경로(정책금리 인하→시장금리 하락→총수요 증대→성장률 제고)’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이때 통화정책 효과는 금리인하에 따른 총수요 증가, 즉 탄력도에 의해 결정된다. ‘탄력적’이면 크고(케인즈언), 비탄력적이면 적다(통화론자).
금리인하에 따른 총수요 탄력성은 경제발전 단계, 경제주체의 캐쉬 플로우, 화폐 환상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달라진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경제발전이 미성숙 단계인 신흥국처럼 자금수요 초과상태에서 화폐 환상까지 있으면 ‘탄력적’으로, 그 반대의 경우는 ‘비탄력적’으로 나타난다. 한국은 준선진국에 속한다.
이 때문에 통화정책 관할대상에 어디까지 포함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그린스펀 독트린’처럼 실물경제만 고려한다면 우리도 금리인하에 따른 총수요 탄력도가 비탄력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효과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선진국이거나 특정국이 경제발전 단계가 높아질수록 그 정도는 심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버냉키 독트린’처럼 자산시장까지 포함시킬 경우 금리인하에 따른 총수요 직접증대 효과가 적더라도 주가와 부동산값 상승에 따른 ‘부(富)의 효과’로 총수요 간접증대 효과는 의외로 크게 나타날 수 있다. 임금소득에 비해 자산소득은 불로소득 성격이 짙어 같은 소득이라도 쉽게 쓰기 때문이다.
온라인 급진전에 따른 네트워킹 효과로 통화정책에 있어 심리적인 요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맞는 통화정책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런 시대에서 통화정책을 비롯한 모든 정책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정책수요층에게 확실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처럼 시중은행의 이기주의와 보신주의로 정책금리와 시장금리 간 체계가 잘 잡혀 있지 않는 국가에서는 정책금리를 내리면 예금금리보다 대출금리가 내려갈 수 있도록 시중은행을 대상으로 ‘도덕적 설득’을 구해 나가야 한다. 정책금리를 내리고 한은이 손 놓고 있는 것은 ‘미필적 고의’에 해당한다.
다른 통화정책 수단도 활용해야 한다. 우리보다 운신의 폭이 좁은 선진국 중앙은행이 한동안 쓰지 않았던 ‘지급준비율 수단'을 손질해 쓰고 있다. 다른 부처와도 공조 틀을 유지해야 한다. 6월 미국 중앙은행(Fed)의 전격 금리인상,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등 불확실한 대외여건에 대한 대비는 금리인하 효과를 거두는 일이 최선의 방안이다.
지금은 경제가 어렵다. 이럴 때 일수록 기본과 원칙을 지키면서 정치권과 정책당국은 진심으로 정책 수용층의 협조를 구해 나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조금만 뜻대로 안되면 ‘과거 정부와 언론, 국민 탓’ 하면서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또다시 싹이 돋고 있는 ‘한국 경제 위기론’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표 1> 주요 기관 및 투자은행의 한국 경제지표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