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파 배우요? 그런 수식어는 한 마흔쯤 받으면 안 될까요(웃음)”
배우 천우희. ‘써니’의 본드녀로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한공주’로 청룡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그녀. 언제나 어둡고 무거운 역할을 맡았던 그가 이번에는 ‘해어화’의 꽃 연희로 변신했다.
“‘해어화’는 저에게 큰 도전이었어요. 지금까지 보여드리지 않았던 모습에 도전해보고 싶었거든요. 도전은 배우로서의 특권이기도 하잖아요. 새로운 영역에 대한 도전이랄까.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작품이에요”
민낯이, 상처받은 얼굴이 익숙했던 것도 사실이다. ‘카트’, ‘한공주’에서 그래왔듯이. 그래서 천우희는 ‘해어화’를 선택했다. 기생 연희로 분한 그는 곱고 화려한 한복과 드레스를 입고, 일제 강점기 조선의 마음을 노래하는 최고의 유행가 가수로 변신했다.
“노래 때문에 진짜 고생했어요. 연습도 정말 많이 했죠. 연습할 때는 다시는 노래, 음악 영화는 안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끝나고 나니까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또 다른 음악 영화를 한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천우희는 1940년대 창법을 소화하기 위해 4개월간 보컬 트레이너와 함께했다. 기본적인 발성부터 성악 발성까지,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해어화’ 속 두 개의 명장면을 홀로 가득 채웠다. 그 중 하나는 바로 윤우(유연석)가 만든 ‘조선의 마음’을 노래하는 장면. 정가를 부르던 연희(천우희)가 유행가 가수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제 음역대 중 가장 매력적인 음색을 찾기 위해 보컬 트레이너, 음악 감독님, 박흥식 감독님과 계속 얘기했어요. 새로운 곡이 나오면 연습하고, 그러면서 버릴 건 버리는 과정이 이어졌죠. ‘조선의 마음’은 촬영 중반 이후에 나온 노래에요. 촬영 중간중간 틈틈이 연습했죠”
평소 노래를 좋아하지만 듣고 흥얼거리는 것에 만족해왔다는 천우희. 그는 ‘조선의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연희를 연기하기까지 부담도 있었다고 밝혔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해야 하는데 어느 정도로 해야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요즘 일반인 분들도 다 노래를 잘하잖아요. ‘뭐야, 저 정도야?’라는 말을 들으면 어쩌나 싶어서 불안했어요.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의 노래 실력이 돼야 하는데, 스스로 아니라고 생각이 드니까 좌절감도 들었죠. 그래도 촬영하는 10개월 동안 성장한 게 눈에 띄었고,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워요”
노래만이 변신의 끝이 아니다. 화려한 치장도 물론이거니와 이번엔 사랑의 감정도 품었다. 그러나 마냥 밝지만은 않다. ‘가시꽃’ 같은 연희는 노름꾼 아버지 때문에 단돈 5원에 권번에 팔리고, 기생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다. 천우희는 이런 연희를 '밝으려다 만 친구'라고 표현했다.
“연희는 아픔이 있어요. 밝지만 마냥 밝은 친구는 아닌 거죠. 그래서 제가 느낀 대로 표현했어요. 그런데 유일하게 가시를 털어내고 보드라운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소율(한효주)이에요. 그래서인지 한효주 씨가 제 연기를 보고 '연희가 이런 느낌이었구나' 하더라고요. 아마 소율이의 입장에서는 연희의 밝은 모습이 더 많이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웃음)”
유일한 위안이 되어준 친구 소율. 그러나 연희가 사랑에 빠진 남자는 소율의 정인 윤우(유연석)였다. 극에서는 다소 설명이 부족했던 두 사람의 감정선, 천우희에 의하면 생략된 장면에서 두 사람의 감정 흐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희에게 노래는 위안이 되는 존재 정도였어요. 노래에 대한 의지가 있는 건 아니었죠. 그런데 ‘너는 조선의 목소리가 되어야 해’라는 윤우의 말에 1차적인 충격을 받게 되죠. 이후에 윤우가 연희를 집에 바래다주면서 연희의 아버지와 마주하게 돼요. 삶의 수치스러운 일면을 윤우에게 보여주게 된 연희가 울분을 토하게 되는데, ‘네가 조선의 현실을 아느냐. 조선의 마음을 만들겠다고 하지만,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게 현실이다.’ 이렇게요. 윤우도 그 때 충격을 받게 되죠”
“연희와 윤우는 처음부터 사랑에 빠진 게 아니에요. 서서히 마음을 연 거죠. 예술적 교감이 시작이었고, 사랑은 그 뒤에요. 연희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해왔는지를 드러낸, 어쩌면 유일한 연희의 전사인 거죠”
다소 아쉬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배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답했다.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했어요. 감독님은 세 캐릭터의 관계보다 각 캐릭터의 이기심과 욕망에 초점을 맞췄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연희를 이해하기까지 혼란스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주어진 상황 안에서 역할을 최대한 표현했어요. 그게 배우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요”
“모든 캐릭터가 저로부터 출발하지만, 지금까지 맡았던 캐릭터들이 실제 성격과 비슷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캐릭터의 시선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기거든요. 공감보다는 이해를 하는 거죠. 이번에는 이해의 정도에도 조금 난해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덕분에 더 집중해서 풀어나갔던 것 같아요”
천우희는 캐릭터를 이해하는 과정을 ‘조각’에 비유했다. '왜?'라는 의문을 통해 하나씩 깎아내고, 조각하는 과정을 거쳐야 캐릭터가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가면 분석하고 계획했던 것들도 모두 잊는다고. “시나리오를 보고 연기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만, 막상 현장에 가면 달라요. 그 상황에 놓여있다고만 생각하는 거죠. 그래야 자유롭게 몰입할 수 있고, 새로운 게 생길 수 있어요. 또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나올 수도 있고요. 현장의 감, 날 것 같은 느낌을 좋아해요. 물론 이런 것들이 잘 나오려면 철저한 분석이 기본이 돼야겠죠”
천우희는 연기에 대한 열정과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후 수많은 시나리오를 받았지만, 쉽게 시나리오를 선택하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선택한다는 게 제 버킷리스트를 지우는 것처럼 간단한 과정은 아니니까요. 또 저는 제 캐릭터만 보는 게 아니라 시나리오 전체를 보고 작품을 결정해요. 굳이 어렵고, 무거운 작품을 선택하려는 게 아니라 선택하고 나면 그런 작품이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올해도 쉽지 않은 영화로 대중과 마주한다. 다음달 12일 개봉을 앞둔 '곡성'과 올해 개봉 예정인 '마이엔젤'이 그렇다. 그러나 한 번쯤 로맨틱 코미디 속 마냥 사랑스러운 천우희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도 사실. 더욱이 스크린 아닌 브라운관에서도 천우희를 보고 싶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천우희의 생각은 어떨까. "로맨틱 코미디요? 정말 하고 싶죠. 저도 원해요. 드라마든 영화든 좋은 기회가 온다면 해보고 싶어요. (웃음)" (사진=나무엑터스, 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