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송중기, 류준열, 이제훈. 최근 국내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장악하며 이름 석자가 곧 브랜드가 된 이들에게도 대사 한 마디에 울고 웃었던 단역 시절이 있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을 과거 수많은 드라마·영화 속에서, 깨알 같은 분량에도 혼신의 열연을 펼쳤던 이들의 활약상을 되짚어봤다.
▲ 류준열
지금으로부터 약 1년전, 류준열은 KBS2 드라마 ‘프로듀사’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당시 류준열은 김수현(백승찬 역)과 함께 갓 입사한 신입PD 역을 맡아, 선배 PD인 공효진(탁예진 역)의 지시를 받아 적는 연기를 선보였다. 다른 배우들 사이에 묻혀 스쳐 지나간 장면이지만, 살짝 경직된 듯한 표정과 정장 차림으로 업무 내용을 끊임없이 받아 적는 열성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프로듀사'의 또 다른 장면. 드디어 류준열의 극중 이름이 등장한다. 신입PD들이 담당 프로그램을 배정받는 장면에서 박혁권(김태호 역)은 류준열에게 “주종현이, 1지망 어디였지?”라고 묻는다. “네! 저는 ‘유희열의 스케치북’ 입니다”라는 류준열의 패기 가득한 대답에, 박혁권은 “응 너는 ‘출발 드림팀’”이라고 무심히 말했고, 이내 실망한 류준열의 표정이 이어졌다.
▲ 이제훈
이제는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한 이제훈 역시 단역부터 차근차근 시작했다. 그는 영화 ‘방자전’에서 조여정(춘향 역)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뒤에서 시중을 드는 한복장이 역으로 등장했다. 불과 10초 정도의 짧은 출연이었지만 최근 이제훈을 알아 본 팬들의 눈에 포착됐다.
재미있는 것은 ‘방자전’ DVD판 배우들의 코멘터리 편에서 당시 신인이었던 이제훈이 언급됐다는 점이다. 김주혁은 이제훈을 가리켜 “저 남자애는 누구냐”고 물었고, 조여정은 “신인인데 너무 잘했다”고 칭찬했다. 이어 김주혁이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외모를 칭찬하자, 조여정은 “굉장히 매력 있게 생겼다. 너무 열심히 하시더라. 진짜 고마웠다”고 덧붙였다. 이는 톱배우가 된 이제훈의 성장을 예고한 ‘성지’처럼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임수정-공유 주연의 영화 ‘김종욱 찾기’에 이제훈이 출연했단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단역임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눈에 띄는 외모와 연기 덕분에 영화 개봉 이후 온라인상에서는 "'김종욱 찾기' 조연출 역 배우가 누구냐"며 그를 찾는 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김종욱 찾기’에서 이제훈은 임수정과 함께 뮤지컬 무대 연출을 진행하는 조감독 우형 역을 맡았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선배들의 무대 연출을 돕는가 하면, 임수정에게 사인을 부탁하는 연기로 귀여운 매력을 어필하기도 했다. 특히 이제훈의 최근작인 ‘시그널’을 떠올린다면 낯설 수도 있는 귀엽고 깜찍한 연기들이 다수 등장한다. 이제훈의 “꼬꼬마~꼬꼬마~”라는 짧은 노래와 율동, 애교 가득한 윙크까지 그의 색다른 매력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 송중기
‘태양의 후예’로 국내는 물론 아시아 전역을 휩쓴 송중기의 배우로서의 첫 발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배우지망생 시절, 다수의 엑스트라로 현장 경험을 쌓았던 그가 첫 대사를 받은 작품은 2007년 방송된 SBS 드라마 ‘칼잡이 오수정’이다. 극중 송중기는 ‘기자2’ 역을 맡아 “지금도 칼의 컨디션은 많이 저조한가요?”라는 짧은 대사를 선보였다.
당시 송중기의 상대역은 배우 성동일이었다. 짧은 대사에도 크게 긴장했던 송중기에게 성동일은 “이제 시작이니 떨지 말고 침착하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송중기는 성동일과 다른 조연 배우들이 대사를 주고받는 동안 주로 어깨와 뒷모습만 화면에 비췄다. 얼굴보다 일명 ‘어깨 연기’의 비중이 더 컸지만 지금과 다르지 않은 훈훈한 외모는 시선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영화 ‘쌍화점’은 22세 송중기의 앳된 얼굴을 볼 수 있는 작품. 당시 송중기는 왕을 지키는 36인의 미소년 친위부대 건룡위에서 노탁 역을 연기했다. 잠깐이었지만 송중기에겐 처음으로 얼굴을 스크린에 비춘 중요한 작품이었다. 당시 송중기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영화 촬영 당시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도 했다.
송중기는 “유하 감독님이 대사 읽어보란 말 대신 ‘너 달리기 좀 하냐?’고 물으시더라. 과거 쇼트트랙을 했던 경험을 말하며 자신있다고 했더니 출연시켜주셨다”고 남다른 캐스팅 비화를 언급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뛰는 장면을 찍게 됐을 때, 쇼트트랙을 달리는 듯한 코믹한 폼은 오히려 감독의 신뢰를 떨어트리는 계기가 됐고, 송중기는 대사를 잃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감독님이 내가 못 미더우셨던 것 같다. 3개월 전부터 연습했던 소중한 대사 한 줄이 임주환씨에게 넘어갔고 나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송중기는 말을 타는 신에서 낙마해 허리에 돌이 박힌 상황에서 감독에게 “대사 한마디와 바스트 단독 샷 하나만 주시면 말 타고 10km도 뛰겠다”고 웃어보였고, 검무신을 찍다가 다리 인대가 늘어났을 때도 “대사 한 마디만 주시면 하루 종일 춤 추겠다”며 부상에 아랑곳 않는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마침내 감독의 마음을 움직인 송중기는 “저도 형님 따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서 말에서 내리십시오”라는 대사를 얻게 됐고, 이후 “극장에 가서 그 장면을 보는데 눈물이 났다"는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사진=KBS2 드라마 '프로듀사', SBS 드라마 '칼잡이 오수정' 방송화면 캡처, 영화 '방자전', '김종욱 찾기' 캡처, '쌍화점'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