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고초를 겪으며 미쳐버린 여자부터 끔찍한 연쇄살인의 피해자까지. 우리는 종종 영화 속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는 여자들과 만난다. 그리고 여기 그 끔찍한 상황에 놓인 인물을 연기하는 가혹한(?) 운명의 배우들이 있다. 이들은 한계상황에 갇힌 인물을 실감나게 그려내기 위해 실제 자신의 체력과 감정을 극한으로 밀어붙이곤 한다. 영화사에 오래 기억될만한 전무후무한 캐릭터로 강력한 인상을 남긴 여배우 3인을 꼽아봤다.
▲ 전도연
믿기 힘들 정도로 사나운 팔자를 누구보다 처절하게 그려내는 것. 전도연은 이 분야에서 1인자라 할 만 하다. 그는 영화 ‘카운트다운’에서는 목만 내놓은 채 매장 당했고, ‘밀양’에서는 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했으며 ‘너는 내 운명’에서는 에이즈에 걸린 다방 종업원으로 등장해 사랑을 떠나보내는 고통을 겪었다.
심지어 영화 ‘집으로 가는 길’에서는 하루아침에 마약 운반범으로 체포돼 프랑스 외딴 섬의 교도소에 수감된 뒤 무죄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했다. 그것 뿐이랴. 영화 '하녀'에서는 상류층 대저택에 들어가는 하녀로 등장했다. 그는 주인집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결국 낙태 당하고 분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과거 전도연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극한 상황에 몰린 인물들을 주로 연기한 것과 관련해 언급한 바 있다. 그는 “계속 어려운 역만 맡은 건지, 쉬운 역을 어렵게 연기한 것인지 모르겠다”면서 “하지만 모든 역이 내게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라고 독한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 이정현
이정현 역시 고생스런 캐릭터 전문 배우로 꼽을 수 있다. 1996년 영화 ‘꽃잎’ 촬영 당시 이정현은 불과 17세의 어린 나이로 신들린 메소드 연기를 펼쳤다. 극중 이정현은 5·18로 정신을 놓아버린 소녀 역을 맡았다. 충격적인 설정의 캐릭터였던 만큼 비하인드 스토리도 흥미롭다. 이정현은 지난해 출연한 방송을 통해 “정신 나간 소녀 역을 어떻게 연기할지 고민하다가 그 사람 인생대로 사는 게 답이다 싶어서 촬영 3~4시간 전부터 미리 의상을 입고 촬영지에 가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시골 동네였는데 마을 할머니들이 정말 정신 나간 사람인 줄 알고 나를 데려가서 목욕시키고 밥을 주셨다. 그러다보면 제작진이 ‘촬영해야 한다’며 날 데려가곤 했다”라고 회상했다.
이어 이정현은 영화 ‘명량’에서는 왜군에 의해 가족을 잃고 벙어리가 된 화포장의 딸 정씨여인을 연기했고, 최근에는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통해 억척스러운 생활의 달인 수남 역으로 연민과 광기를 적절히 배합한 열연을 펼쳤다. 특히 그가 맡은 수남은 생계를 위해 신문배달, 식당 서빙, 건물 청소, 명함 돌리기 등 고된 일을 하며 열심히 사는 평범한 여자였지만, 이후 자신의 행복을 방해하는 이들을 처참하게 살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정현은 잔혹함 이면의 순진무구함을 표현하기 위해 조카를 보며 어린아이의 글씨체를 맹연습하는가 하면, 아이가 거짓말 할 때 짓는 표정 등을 모방하며 완벽한 캐릭터 소화를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특히 이정현은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꽃잎'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속 인물의 광기를 비교하며, '꽃잎' 속 소녀를 '더 미친여자'로 꼽기도 했다. 그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꽃잎’에 비하면 절반도 안 미쳤던 것 같다. '꽃잎'은 지금 다시 봐도 정말 내가 미친 것처럼 보인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 서영희
국내에서 핏빛 광기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한 여배우는 또 있다. 바로 서영희다. 그는 영화 ‘추격자’,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스승의 은혜’, ‘궁녀’ 등 유독 공포 스릴러물에 자주 등장했다. 특히 극중 역할들의 팔자는 대부분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기구하다. ‘추격자’에서는 연쇄살인범에게 붙잡혀 생사의 갈림길에서 극한의 고통을 겪은 출장안마사였고,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에서는 고립된 섬마을에서 학대당하다 잔혹한 살인을 저질렀으며, ‘스승의 은혜’와 ‘궁녀’ 역시 지독한 복수극을 펼치는 역할의 연장이었다. 서영희 특유의 순수한 이미지 덕에 이같은 캐릭터의 반전효과는 오히려 극대화됐다.
특히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에서 서영희의 고생은 정점을 찍는다. 극중 서영희가 맡은 김복남은 거무스름하고 어리숙한 얼굴로 등장해 고립된 섬마을에서 강간, 폭행 등 온갖 고초를 겪는다. 그러다 돌연 살인자로 변모해 잔혹한 복수극을 펼치게 된다. 낫으로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씬, 강간당하는 씬 등 여배우에게 너무 가혹한 내용 탓에 출연을 고사한 여배우들이 많았을 정도다. 그만큼 김복남을 연기하는 서영희의 정신적 건강이 염려됐을 정도로 캐릭터가 가진 광기의 폭은 크고 변화무쌍했다.
당시 서영희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우울하거나 고지식한 캐릭터 연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극과 극을 오가는 배역 제의가 많이 들어온다”라며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도 힘들게 살까봐 걱정하더라. 하지만 원래는 밝은 성격”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또 영화 속에서 피해자 역을 주로 맡는 것에 대해 “촬영 당시에는 어렵고 힘들지만 결과적으로 즐거운 순간만 기억에 남는다. 이런 것들이 고생에서 얻는 희열인 것 같다. 그래서 또 다른 고생을 찾는 데 중독이 됐다”라며 연기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전했다. (사진=영화 '집으로 가는 길', '하녀', '밀양', '꽃잎',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스승의 은혜',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추격자'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