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풍경이었습니다. 29일 열린 삼성정밀화학의 주주총회가 그랬습니다.
주총장에 노조원들이 등장합니다. 무언가에 항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총을 끝으로 물러나는 성인희 사장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해 모인 겁니다. 손에는 꽃다발 하나씩을 들었습니다.
꽃을 든 노조원들은 성인희 사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헹가래까지 쳤습니다.
삼성정밀화학은 이번 주총 이후 '롯데정밀화학'이라는 새로운 사명으로, 롯데의 계열사로 다시 시작합니다.
삼성그룹의 계열사가 다른 그룹의 계열사로 넘어가면 심각한 내부 반발을 겪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앞서 한화로 넘어간 삼성종합화학은 노조 반발로 직장폐쇄까지 겪었습니다.
그런데 삼성에서 롯데로 적을 옮긴 회사의 노조가 떠나는 사장을 위해 공장에서 올라와서 깊은 감사를 표한다, 선뜻 이해가 어려운 장면입니다.
혹시 회사에 반발하기 어려울 정도의 위로금을 지급한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취재 결과 삼성정밀화학 근로자들이 받은 위로금은 업계 통상 수준. 롯데케미칼로 넘어간 여수의 삼성SDI 근로자들보다도 적은 금액을 받았습니다.
왜 노동조합은 빅딜을 잡음 없이 받아들이고, 떠나는 성 사장에게 꽃을 전달했을까요. 여기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성 사장이 삼성정밀화학 사장으로 처음 취임했던 때로 돌아가 짚어봐야 합니다.
성 사장이 삼성정밀화학의 최고경영자로 취임한 직후 찾아간 곳은 현장 노조였습니다.
삼성정밀화학 노조는 한국노총 산하로, 현재 노조위원장인 이동훈 위원장이 전국화학노동조합연맹 울산지역 본부장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800여명의 근로자 가운데 약 420명이 노조 소속입니다.
88년 이후 무파업 기조를 이어가고 있긴 하지만, 성 사장의 임기 중에도 임단협 문제로 회사를 점거해 농성을 진행하는 등 어용 노조로 보기는 어려운 곳입니다.
노동조합 관계자는 "성 사장이 취임하자마자 현장을 방문해 노사 관계 개선 의지를 나타낸 것이 대화 분위기 조성을 이끌어냈다"고 회상합니다.
경직됐던 과거 관행을 고치기 시작하면서 현장 근로자들의 마음을 얻었다는 겁니다.
성 사장은 회사 임원들만 참석했던 경영전략회의에 노조 관계자들을 함께 참석시키기 시작했습니다. 회사 상황을 투명하게 공유하고, 미래 전략을 노사가 함께 짜자는 이유에서입니다.
영업이익이 흑자로 돌아서기 직전인 2013년과 2014년에는 성 사장이 노조위원장과 노조 간부들을 불러 해외 세일즈에도 함께 나섰다고 합니다.
어려운 해외 업황을 공유하면서 경영진에 대한 신뢰도를 쌓을 수 있었던 사건이라는 게 노조 측의 설명입니다.
지난해 빅딜을 통해 회사가 롯데그룹으로 넘어가기로 결정된 뒤에는 노사가 함께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공동 대응에 나섰고, 이같은 공조가 삼성그룹 계열사로는 이례적으로 롯데 측의 지분인수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낸 배경이 됐다는 겁니다.
그리고 성 사장은 임기 마지막해인 2015년 영업이익 흑자전환과 900억원에 이르는 당기순이익 실현이라는 성적표를 내고 그동안의 행보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성 사장의 퇴임과 함께, 롯데정밀화학으로 태어나는 삼성정밀화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습니다.
앞으로 롯데정밀화학은 롯데그룹에서 온 경영진들이 진두지휘를 맡습니다. 오성엽 롯데케미칼 부사장이 신임 대표이사로 부임했고, 오 대표와 함께 새로운 등기이사가 된 인물도 롯데케미칼에서 온 정경문 기획부문장입니다.
쉽지 않은 업황 속에서 상장사로서 투자자들에게 실적을 보여줘야 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경영진들이 성 사장과 근로자들이 쌓아온 노사관계를 어떻게 이어갈지도 주목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박수를 받고 떠난 성인희 사장의 마지막 모습과 그동안의 행보는 우리 산업계에 시사하는 바가 커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