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팬 사이에서 '명작'은 어떤 작품일까? 각종 포털 및 커뮤니티에서 '애니메이션 추천'을 검색하면 명작으로 꼽히는 애니메이션은 스무 개 남짓이다. 단지 그들만의 세계에서 인기가 많은 것으로는 부족하다. 각자 선호하는 장르가 뚜렷한 마니아층 모두에게 호소할 수 있는 보편성과 애니메이션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쉽게 몰입할 수 있는 흡입력을 갖춰야 한다. 이 두 성질은 마니아와 일반인의 간극만큼이나 양가적이라 동시에 충족하기 힘들다. 이런 작품은 평균적으로 1년에 한 편 정도가 꼽히는데, 그마저도 완결 후 긴 토론 끝에 내려지는 평가라 그 반열에 오르는 게 쉽지 않다.
그러나 현재 방영 중임에도 이미 '명작'이라 불리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심지어 원작 만화도 연재 중이라 공식 결말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현재까지의 연출과 스토리만으로도 독보적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다. 그인기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한국 공식 수입처인 '애니 플러스' 평점 9.9, 일일 랭킹 1위를 고수 중이다. A-1 픽처스 제작의'나만이 없는 거리'다.
'나만이 없는 거리'는 만화가 산베 케이의 추리 만화가 원작이다. 2012년 7월에 연재를 시작했고 단행본은 현재 7권까지 발매되었다. 한국에서는 2015년 1월부터 'S코믹스'에서 '나만이 없는 거리'라는 제목으로 정발 중이다.2016년 3월 완결 예정으로, 애니메이션과 동시에 결말을 맺는다고 한다.
스토리는 만화가 지망생 '후지누마 사토루'가 지닌 신비한 능력에서 출발한다. 그 능력은 '리바이벌'이라 부르는 현상으로, 주위에서 사고 등 안 좋은 일이 발생할 때 몇 분 전으로 돌아가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말한다. 하지만 돌아간다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따라서 사토루가 열심히 주위를 살펴 사건에 개입하지 않으면 비극은 원래대로 진행되어 누군가 죽거나 다친다.
그러던 어느 날, 사토루는 아르바이트인 피자 배달을 하다 리바이벌 현상을 겪고 부상을 감수하는 대신 인명 피해를 막는다. 그 후 오랫동안 떨어져 살던 어머니가 병문안을 핑계로 사토루 집에 눌러앉는다. 하지만얼마 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사토루는 칼에 찔려 죽은 어머니를 발견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사토루가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그는 도주한다. 이때다시 리바이벌 현상이 벌어지고, 이번에는 몇 분이 아닌 18년의 세월을 건너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간다. 그리고 사토루는 어머니를 죽인 범인이 초등학생 때의 연쇄살인 사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깨닫고 미래의 비극을 바꾸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나만이 없는 거리'의 강점은 '장르의 적절한 배합'이다. 단지 추리물로만의 질을 놓고 보면 범인을 유추하기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 '리바이벌'이라는 공상의 소재를 넣어 박진감을 높였다.또한 리바이벌과 같은 '시간 회귀'의테마는 국내 드라마를 비롯해 수많은 창작물에서 즐겨 쓰는 코드이므로 대중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이렇다 할 능력이 없는 주인공이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성장하는 '성장물'의 성격도 띠고 있다. 이외로도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마니아만 공유할 수 있는 코드들을 비교적 적게 배치하고, 대신 '단절된 소통'이나 '정의'에 대한 통찰을 진중하게 그리는 데 집중했다. 이러한 미덕들은 '나만이 없는 거리'가 애니메이션을 넘어 현재 진행 중인 영화화와 소설화까지 이루어지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작품 외적으로 인상적인 건 주인공의 성장이 작가 산베 케이의 인생과 어렵지 않게 연결된다는 점이다.이렇다 할 후속작을 내놓지 못한 채 퇴짜만 맞으며 진로를 고민하는 주인공 만화가 후지누마 사토루. 그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두려워 작품에 몰입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며 괴로워한다. 이는 96년 데뷔 후 19년 간의 만화가 경력 동안 이렇다 할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나만이 없는 거리'에 이르러 마침내 만개한 작가 산베 케이의 노력과 겹쳐 보여 사뭇 감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