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미 넘치는 악역이 좋아요"
영화 '오빠생각', '로봇, 소리'. 모두 따뜻한 인간애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갈등을 조장하는,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악역 '갈고리'와 '신진호'. 이 두 인물을 연기한 이희준을 팔판동 한 카페에서 만나 그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인터뷰 중간에 반달 눈웃음을 지으며 농담을 늘어놓더니 연기 얘기가 나오면 어느새 눈빛이 무섭게 변하는 그런 배우였다.
이희준이 출연한 영화 '오빠생각'과 '로봇, 소리'가 곧 개봉한다. 영화 두 편의 개봉을 앞둔 그는 홍보 활동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했다.
"인터뷰를 많이 해서 같은 얘기가 반복되면 지겨우실까봐 항상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두 영화 모두 즐겁게 촬영했고, 저에게는 소중한 작품이기 때문에 관객들이 잘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제 열정과 현장의 분위기가 잘 전달되길 바랄 뿐이에요."
이한 감독의 '오빠생각'은 6.25 전쟁 당시 있었던 어린이 합창단을 소재로 만든 영화다. 이호재 감독의 '로봇소리'는 딸을 잃은 아버지가 딸을 찾는 과정에서 인공지능 로봇을 만나 풀어내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감독이 만든 전혀 다른 내용의 두 영화는 촬영장 분위기도 달랐을 것. 이희준이 느끼는 현장 분위기는 어땠을까.
"감독님은 배의 선장이고 배우들은 선원이라고 생각하는데, 감독님마다 현장의 스타일이 달라요. 이호재 감독님은 영화 촬영하기 전에 그리셨던 콘티와 영화가 90% 일치했어요. 그게 되게 놀라웠는데, 처음에 계획했던 그대로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고수했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반면 이한 감독님은 배우에게 많이 맡기시고, 영화를 함께 만들어가는 스타일이에요. 이한 감독님과 작업하면서 제 생각을 많이 말씀드렸어요. 예를 들면 전쟁으로 한쪽 팔을 잃은 갈고리가 악역으로 나오는데, 저는 갈고리가 단순히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도 그냥 한 인간일 뿐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어서 감독님께 몇 가지를 부탁했어요. 잘 때는 갈고리를 빼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안경을 끼듯 갈고리를 자연스럽게 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저는 그 부분에서 갈고리라는 인물이 인간적인 느낌을 나타낸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그 장면은 정말 마음에 들어요. 감독님도 제 의견을 들어주셨고 그날 바로 만들어진 부분이에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조연은 극의 활력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종종 러닝타임의 제약 때문에 편집이 되기도 한다. 이희준 역시 '오빠생각'이나 '로봇, 소리'에서 조연의 역할을 하며 자신이 연기한 부분이 편집이 됐다고 한다. 어떤 배우도 자신의 역할이 작다고 해서 소홀히 연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공들여 연기한 장면이 편집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사실 '오빠생각'에서도 그렇고 '로봇, 소리'에서도 그렇고 영화의 러닝타임상 줄어든 부분이 있어요. 주인공의 분량을 줄일 수는 없으니 당연히 제 부분이 편집됐을 거에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부분에서 감독님의 의견을 존중해요.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그 배에 탄 선원이고 감독님은 선장이잖아요. 감독님이 스토리를 헤치지 않는 선에서 가장 적절한 것들을 편집하신 거 같아요. 그건 감독님의 권한이고 항상 존중해줘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우 개인으로써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그는 "해관이 테러리스트도 아니고 대단한 범죄자도 아닌데 신진호는 계속해서 해관과 로봇을 놓치잖아요. 제가 신진호였다면 정말 화가 났을 거에요. 그래서 결국 국정원이 로봇을 쟁취하게 됐을 때, 사람들 다 있는 데서 해관의 뺨을 심하게 한 번 때렸어요. 국정원 요원으로써 느낌 모멸감을 그런식으로 표출한거죠. 그런데 그 부분도 편집이 됐어요."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기자가 "그 부분은 왜 편집이 된거에요? 있어도 괜찮을 거 같은데"라고 묻자 그는 "그렇죠? 있어도 괜찮을 거 같은데..하지만 그건 제 욕심이죠. 저도 궁금하지만 감독님의 어떤 의도가 있었을 거에요. 그 의견을 존중하고 감독님을 사랑합니다. (웃음)"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빠생각'에서 갈고리는 조연이지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이다. '로봇, 소리'의 '신진호' 역시 갈등을 조장하며 극의 활력을 불러넣지만, 비중이 크지는 않다. 이희준이 국정원 요원 '신진호'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신진호 역할은 비중도 작고 편집도 많이 됐어요. 그래도 이 작품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당시에 제안 받았던 대본 중에 가장 신선했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로봇을 소재로 했다는 부분에서도 마음에 들었고요. 제가 이 영화에 출연을 결정했을 때 이성민 선배님은 아직 캐스팅 되기 전이었는데, 이성민 선배님이 출연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죠. 국정원 요원 신진호 역도 어떻게 보면 악역인데 저는 이 부분에서도 인간미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감독님께 엄마와 통화하는 장면 등을 넣자고 제안했고, 그게 받아들여지면서 국정원 요원의 딱딱한 이미지 보다는 우리 주위에 있을 법한 사람으로 재탄생했죠. 이 영화 자체가 로봇 얘기라기 보다는 결국은 '인간애'를 말하고 있거든요. 그 부분에서 극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이희준이 캐릭터를 선택할 때는 확고한 기준이 있다. 주로 악역을 맡았지만, 그는 완전한 악인이나 선인을 연기하는 것은 끌리지 않는다고 한다. 악역이지만, 그 안에서 인간미를 발견할 수 있는 역할을 선호한다고 했다.
"신진호를 연기하면서 '내가 이런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생각을 주로 할까. 이런 상황이면 뭘 욕심낼까'를 생각하면 당연히 신진호처럼 할 것 같았아요. 인정받고 싶고, 더 올라가고 싶고. 그게 모든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니까요. 그 욕망을 정해진 대사 안에서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었어요. 결국은 마음대로 안 되는. 우리 인간은 다 그렇잖아요. 저조차도 늘 부족하니까 잘하려고 욕심내는데 잘 안되고 실수하고 그런 모습이 저는 가장 인간적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보는 세상의 인간은 다 그렇고요. 많이 실수하고 뜻대로 잘 안되는 게 인생인 것 같고요. 그래서 저는 캐릭터를 선택할 때 그 부분을 먼저 봐요. 갈고리도 자기가 생각할때는 이게 맞다고 해서 그렇게 행동하는데 한소위(임시완)라는 역할이 나를 가로막고, 결국 잘 안되는.. 이런 것들이 흥미로워요. 멜로를 한다면 '연애의 목적'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아요. 실수하고 부족한 면이 보이니까 공감이 가요. 그런면에서 피한방울도 안 나는 냉혈한이나 끝까지 착하기만한 역할은 제가 다른 배우들만큼 잘할 자신도 없지만 흥미를 덜 느껴요."
곧 결혼을 앞둔 예비신랑 이희준에게 10년 동안 딸을 찾아 헤매는 해관의 모습을 어떻게 비춰졌을까.
"예전에 한 번 딸을 가진 아빠 역할을 제안 받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아직 그 정서를 다른 배우들만큼 잘 이해해서 표현할 자신이 없었어요. 감독님이 정말 원하셨는데 정말 죄송하다며 고사한 적이 있었죠. 그 나이대가 되면 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제가 아이아빠의 감성을 이해하지는 못해요. 제가 공감을 못하면 관객들도 공감을 못할 거라고 확인해요. 제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대본을 봤을때 제 심장이 뛰는 게 우선이에요. 내가 그 캐릭터에 공감을 해야 관객이 믿을 수 있는 연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취재나 인터뷰를 통해 접할 수 있고 그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다면 해요. 예를 들어 영화 '해무' 같은 경우에는 제 나이 또래의 선원을 직접 만나서 인터뷰를 했어요. 그 사람의 고민, 언제 행복한지 등의 고민을 들어보면서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요. 그래서 할 자신이 생기면 하죠.
연기할 때 꼭 취재를 한다는 그는 취재 자체를 즐긴다고 한다. 그에게는 취재가 연기에 반영이 되든 안되든 만나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의 애환을 듣는 시간이 행복한 순간인 것이다.
"취재를 하면 좋은 게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삶을 반추해보는 시간이 되기도 하거든요.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죠. 갈고리 역을 할 때도 친한 형의 할아버지가 실제 전쟁에서 다리 한쪽을 잃으셔서 아직도 의족을 하고 계시는데, 그분을 취재했어요. 그분이 잘때는 의족을 빼 두시고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착용하신대요. 양말처럼 생각하신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감독님께 그 부분을 제안했거든요. 그 장면 하나로 그냥 나쁜 짓 하면서 사는 인물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보여진다고 생각하고 그런 순간이 되게 소중해요. 인물이 잠에서 깨는 순간, 되게 일상적이잖아요. 일상적인데 되게 묘한 향기를 줄 수 있는 장면이었고, 감독님의 배려가 없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장면이에요."
이희준이 출연한 영화 '오빠생각', '로봇, 소리'는 각각 21, 27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사진 한국경제TV MAXIM 윤예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