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준영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사진 = 한경DB)
“주여, 밤을 이다지도 그윽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을 위해서였나이까?”
남산의 소나무가 매서운 겨울바람을 이겨내는 유리문 안 한국자유총연맹 접견실에서 대한민국 보수의 수장(首長) 허준영 총재는 앙드레 지드의 소설 ‘전원 교향곡’의 명문을 유창한 프랑스어로 암송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허 총재는 잠시 가여운 영혼 제르트뤼드와 자크의 너무도 슬퍼서 아름다운 이야기 속으로 여행을 떠난 듯 했다.
7개 국어에 유창한 허준영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는 3개 고등고시를 동시에 준비하다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관으로 공직에 입문했다. 외무고시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1984년 경찰에 입문해 치안총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후 코레일 사장과 국제철도연맹 아시아지역 의장을 거쳐 정치권에 입문했지만,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모두 2등으로 낙선한 후 대한민국 보수의 총본산 한국자유총연맹의 총재로 부활한 그는 대한민국 강한 남자의 상징과도 같다.
그런데 새로운 것에 대한 끝임 없는 도전과 건장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찔러도 피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허 총재와의 대화에서 받은 첫 인상은 의외로 “참 문학적”이란 것이었다. 왜 그가 ‘알부남(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이라 불리는지 금방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취재진은 잠시 그가 경찰이란 경직된 직업보다 작가가 됐더라면 우리 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을 수도 있을 거란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실제로 소년 혹은 청년 허준영은 학창시절 영화와 문학에 심취했었던 로맨티스트였다. 일주일에 이삼일을 영화관에서 살다시피하며, 영국과 독일, 불란서 소설을 원어로 읽으며 온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고 한다. 직책이 주는 중압감을 내려놓고 인터뷰에 열중하는 그는 어느새 ‘소년 혹은 청년 허준영’으로 돌아가 있었다. 로맨티스트 청년(靑年)에서 보수단체의 수장(首長)으로 변신한 ‘인간 허준영’을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이하 인터뷰 전문
Q. 포장되지 않은 허준영, 즉 소년(少年) 혹은 청년(靑年)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하려합니다.
A. 학창시절에는 해외 문학에 심취했었습니다. 고려대 법대에 진학을 했지만 법전보다는 외국어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됐습니다. 언어에는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 등이 다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외국어를 음미하면 정신세계가 넓혀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외국어가 좋아서 공부하다 보니 7개 국어까지 하게 됐습니다. 영어와 독일어, 중국어, 불어, 일본어, 스페인어는 신문과 책을 읽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Q. 원서로 명작을 읽으면 감동이 다를 것 같은데요. 감명 깊게 읽은 소설은?
A. 독일어로 본 책으로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괴테의 ‘파우스트’, 불어는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과 ‘전향교향곡’ 등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특히 원문을 읽다 보면 문학적 표현 등이 기억납니다. ‘전원 교향곡’의 “주여, 밤을 이다지도 그윽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을 위해서였나이까”란 문장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너무 슬퍼서 아름다운 이야기, 그 때는 내가 제르트뤼드나 자크같은 비련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Q. 사춘기, 특히 고등학교 시절은 어땠나요?
A. 경북고 재학 시절 덩치도 있고 하다 보니 소위 ‘학교짱들’로부터 일명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무차별한 싸움보다는 의협심이 강해서 그런 제의에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집주변(대구 중구 동성로)에 극장이 있었습니다. 극장에서 영화나 연극을 보는 것을 좋아해 1주일에 2,3번은 반드시 관람했습니다. 당시 ‘모세’나 ‘십계’ ‘쿼바디스’ 등 외화가 많이 개봉됐는데, 주인공 이름 등을 외우는 놀이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언어적인 분야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배우 ‘데보라 카’가 나온 영화가 가장 많이 생각납니다. 이러한 영화와 배우, 그리고 명대사가 외국어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해준 것 같습니다.
Q 시간은 더 거슬러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A. 대구에서 태어나 3학년 때 대구 종로초등학교로 전학을 갔고, 6학년 때 사춘기가 일찍 오는 바람에 공부가 하기 싫어, 학교를 가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 매우 혼내셨지만 저는 뜻을 굽히지 않고 대구 팔공산과 비슬산 등을 뛰어다니며 1년 동안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초등학생의 방황, 언뜻 들으면 우습죠? 그러나 다시 마음을 잡고 초등학교 6학년에 복학을 하게 됐습니다. 방황을 일찍 끝내다 보니 이후 공부에 더 뜻을 품게 돼 더욱 열심히 하게 됐습니다. 전학과 복학을 하다 보니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 모두 8분이셨는데, 지금도 존함을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필덕, 성한식, 윤주태, 박칠량, 성덕경, 설창동, 이기적, 이규태 선생님이십니다.
Q. 시간을 다시 대학시절로 돌릴까 합니다. 고등고시를 공부한 계기는?
A. 학창시절 의협심이 강해 동네 깡패들이 돈을 뺏는 행위를 볼 때마다 물불 안 가리고 약자를 위해 싸우기도 했습니다. 의협심이 강한 점이 공무원이 되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고려대 법대와 서울대 행정대학원 시절 사법, 행정, 외무 등 3대 고등 고시를 동시에 준비하게 됐습니다. 독한 마음으로 하루 15시간 책을 보았습니다. 하루 종일 공부하다보니 저에게 유일한 낙은 음식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루에 3끼로는 부족하더군요. 그래서 5끼를 먹었습니다. 그렇게 먹고 공부하고, 먹고 공부하고, 이 생활을 3년 정도 하다보니 실력이 늘게 되고 서브노트가 완성됐습니다. 30여권정도 됐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외국어는 어린 시절부터 관심 분야다보니 외무고시를 가장 먼저 합격했습니다.
Q. 외교관 생활을 하다가 경찰공무원으로 전향한 것은 매우 특이한 사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인 외교관의 꿈을 접게 된 계기가 있었다면.
A. 외교관도 중요하고 멋진 직업이라 생각합니다.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외무부에서도 보람된 일도 있었고 반기문 UN사무총장님 등 많은 분들과 같이 근무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외교관으로 근무할 시절 프랑스, 영국 나가게 됐는데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이사 가던 첫날 런던까지 운전해서 가야했어요. 갑자기 좌측운전을 하려니 굉장히 힘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로터리가 나오면 자꾸 오른쪽으로 가서 사고가 날 뻔하고, 런던에 너무 늦게 도착해 대사관 서기관과도 만나지 못해 아무 곳이나 가서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곳이 최고 슬럼가였더군요. 차문이 다 열려있고 가방이 이미 다 털려있었어요. 특히 제가 3개 고시를 준비하면서 만들었던 서브노트들이 과목별로 있었는데, 그 가방을 잃어버렸어요.
당시 간절한 마음에 런던 시내 경찰서마다 열흘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경찰들이 국민에게 치안서비스를 제대로 하고, 국민은 경찰을 존중하는 모습들을 보고 대단히 감동을 받았죠. 노트는 찾지 못했지만 더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특히 경찰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신체와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면 자유민주주의가 될 수가 없고, 재산을 보호하지 못하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꽃필 수가 없으므로 경찰의 임무들은 가장 기본적인 일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 경찰은 국민들로부터 이렇게 사랑을 받지 못할까’라는 고민을 하게 됐고, 선진국으로 가려면 경찰이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돼 경찰에 투신하고자 마음을 먹게 된 거죠.
가족들한테 그 얘기를 꺼냈더니, 큰 반대를 했어요. 또 당시 경찰에서는 매년 고시출신을 8명씩 받았는데, 84년도에는 TO가 한명 밖에 없어서 저 혼자 됐어요. 치안본부 시절인데 처음에는 텃새도 많았어요. 치안본부 엘리베이터를 타면 ‘어디서 빠다 냄새가 나냐’는 얘기도 들었죠. 그렇지만 제가 경찰이 되고 나서는 어떻게 하면 경찰을 더욱 멋있게 만들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이 가장 큰 목표였고, 경찰의 인권을 보호하고 보장해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목적의식이 생겼습니다.
Q. 경찰의 꽃이란 ‘총경’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근무지와 에피소드는?
A. 1993년 경북 영양경찰서장으로 근무할 때입니다. 저의 초등학교 은사님이 교통신호 위반으로 스티커를 받게 됐는데, 아무리 인맥이 있다 해도 법적인 것은 봐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과태료를 대납해 드렸습니다. 나중에 선생님께서 그 사실을 아시고, 당신이 잘못 생각했다고 미안해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또 영양군민 체육대회도 인상적입니다. 당시 경찰관들이 군민체육대회에 출전을 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아니다. 우리도 주민들과 함께 어울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제가 직접 일반부 3000m 달리기에 출전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일반부 3000m 달리기에 출전 선수가 부족해 고등부 3000m 달리기에 출전을 하게 됐습니다. 고등부는 대부분 선수들이기 때문에 출전 자체를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총 7바퀴 반을 뛰어야 하는 것인데, 선수들과 뛰다 보니 내 페이스를 놓쳐 6바퀴 정도 쯤 기권을 하게 됐습니다. 확실히 선수들과 뛰는 것은 힘들더라고요. 완주는 못했지만, 군민들이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군민들은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경찰서장이라는 사람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으셨나봅니다.
그리고 영양은 주변 안동이라는 곳보다는 조금 낙후된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영양보다는 안동에 가서 편의시설을 이용했는데, 저부터 영양군 경제 활성화를 위해 모든 것을 영양에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아내에게 영양군 미장원을 이용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외교관 아내가 졸지에 시골 색시가 돼버렸습니다. 아내에겐 미안했지만 이 또한 군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Q. 경찰청장 재임시 경찰이 국민을 보호하듯 정부와 국민이 경찰의 인권을 보호해줘야하고 책임에 상응하는 권한 또한 과감하게 부여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치셨습니다.
A. 광복 이후 우리 경찰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는 물론이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경찰은 고생한 만큼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죠. 기본적으로 국민에 대한 치안 서비스는 예방 치안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점치안은 0점 치안’이라는 말이 있듯, 잘해도 티가 나지 않아요. 우리 사회는 이 같은 경찰의 예방적인 역할을 간과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선진화의 척도는 공권력에 대한 인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권위주의는 불식돼야 하지만 공권력의 권위마저 부정돼서는 결코 안됩니다. 제가 도난당한 물건을 찾아주는 과정에서 경찰이 보여준 신뢰감 있는 행동은 영국이 왜 선진국인지를 알게 해주었듯, 경찰이 바로 서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사회도 신뢰받는 경찰의 존재가 선진화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국민 모두가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경찰 또한 국가관이 확실하고 역량 있는 젊은이들이 경찰의 길을 선택할 정도로 매력 있는 직업이 돼야 하는 이유죠.
Q. 지난해 2월 한국자유총연맹 중앙회장(총재) 선거 당시 월급을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여전히 무보수인지요?
A. 평생을 외교관, 경찰관, 공기업 사장으로서 현장을 누비며 공복(公僕)으로 땀 흘렸다면, 한국자유총연맹 회장 자리는 500만 회원의 ‘대표 일꾼’으로 국가와 국민에 대한 2번째 봉사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외교관이나 경찰관, 공기업 사장으로 일한 경험이 제가 개인적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됐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자리는 무보수 명예직으로, 지금도 월급은 받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국민에게 낮은 자세로 봉사하는 것이 저의 소임입니다. 허준영이라는 사람이 국민의 세금으로 이만큼 커왔으니, 이제 국민에게 받은 세금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차원에서 사심 없이 직분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Q. 외교관, 경찰관, 공기업 사장 등 여러 자리를 거치셨는데 다양한 이력들이 총재직 수행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A. 우리나라가 국론이 분열되거나 사회적 갈등이 많은 만큼, 그것을 봉합하고 사회를 아우르는 역할을 애국단체로서 한국자유총연맹이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일차적으로는 외연확대가 우선이겠죠. 두 번째로는 전체를 아우르면서 조직 활성화와 내실을 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숫자만 많이 키울 것이 아니라. 안보, 안전, 통일 등 다양한 교육을 통해 국가발전과 국민화합에 기여하는 거죠.
제가 연맹에 온 이래, 저는 조직의 외연을 넓히고, 내실을 기하며 활성화하기 위해 지방에 시군구 단위 행사만 있으면 찾아다녔습니다. 특히 외교관, 경찰관, 코레일 등은 모두 전국 조직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각 지역의 시장, 군수, 도지사님, 정치 지망생 등 많은 분들을 뵙게 됩니다. 또 지역행사에 가보면 그 지역의 경찰서장님도 오시고, 철도공사 사장님도 오십니다. 지역회원들이 그 분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조직 활성화에 도움이 많이 되고 좋아하십니다. 또 해외지부에 나가보면, 각 국가의 대사님이나 총영사님도 많이 알고 있어, 해외지부 회원들과 공관장이 함께 한인회와 지역을 활성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Q. 그동안 가장 중점을 두고 추진했던 사업은 무엇인가요?
A. 먼저 정책적인 측면에서 연맹의 활동목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핵심가치와 추진전략을 만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4대 핵심가치로 자유, 안보, 안전, 통일을, 이를 위한 추진전략으로 창의와 혁신적 사고, 청년‧여성조직 확대, 유관기관 협력 강화, 회원역량 배가를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조직의 내실화와 외연을 확대하는 한편 회원을 정예화하고 국민통합을 이루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한택견연맹, 대한민국부사관총연합회, 대한우슈협회, 신세대문화교류 등 다양한 분야의 단체들이 회원으로 가입해 스포츠, 예비역군인, 사회복지, 문화 등 다방면으로 활동영역을 넓혔습니다.
Q. 한국자유총연맹은 자유·안보·안전·통일을 4대 핵심가치로 추구하고 있는데요. 이 4대 핵심가치에 관한 자세한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A. 취임 전부터 ‘부강한 자유대한, 통일 선진 민주국가 건설’이라는 ‘부자대통 운동’을 강조해왔습니다. 대내적으로는 ‘국민안전’, 대외적으로는 ‘국가안보’를, 그리고 미래에는 ‘선진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 그 실천 전략입니다. 이를 위해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고 공공의식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매진하겠습니다. 이와 함께 자유민주 공동체 발전을 위해 땀 흘리고 있는 우리 500만 회원의 노력과 헌신이 참된 애국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연맹을 만들겠습니다.
Q. 이슬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프랑스 파리 테러로 지구촌이 어수선한 가운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은 만장일치로 ‘테러와의 전쟁’을 결의했고, 이제 우리나라도 안전지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에 한 말씀.
A. 실제로 우리가 무심해서 그렇지, 다른 나라는 우리를 최고 취약국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걸쳐 IS 등 회교권 과격 무장 세력은 물론, 북한의 대남 공작부대, 국내 종북 세력의 테러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법에는 고작 ‘국가대테러활동지침’(1982년 제정) 정도가 있을 뿐이고, 2001년 9·11테러 이후 발의된 테러방지법안 13건도 무려 14년째 국회에 계류 중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42개국 중 테러방지법을 갖고 있지 않은 나라가 우리나라를 비롯해 4개국뿐이라고 합니다.
테러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은 국가가 이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이라도 하루빨리 테러방지법을 제정해 확고한 테러대응 태세를 갖춰야 합니다. 특히 북한의 전천후 도발에 노출돼 있는 우리로서는 테러방지법 제정을 통한 대비책이 시급합니다. 정치권과 시민단체 일각에서 테러 방지를 빌미로 한 국정원의 비대화와 인권침해, 정치사찰 가능성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독립적 감시조직 등 보완 장치를 두거나, 아예 미국의 국토안보부처럼 대테러센터를 새로운 부처로 만드는 것으로 예방이 가능합니다. 부작용을 우려해 테러방지법 제정 자체를 지연시키는 행위는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Q. 우리 사회가 보수와 진보 등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갈라졌다는 지적에 대해선 어떻게 보시는지요.
A. 호국의 대의 앞에 5000만 국민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보수든 진보든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존중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때문에 최근 많은 단체들이 연맹과 함께 국가발전에 기여하고자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연맹은 최근 ‘보수’라는 표현보다 ‘애국’이라는 표현이 연맹의 활동과 방향성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연맹은 ‘미래세대와 함께하는 애국’을 기치로 삼고 우리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가 지켜온 가치를 올바로 인식시키고 활짝 꽃피울 수 있는 이른바 ‘열린 공간‘으로 거듭나려합니다.
Q.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이끌며 불리했던 전세를 단번에 뒤집었던 맥아더 장군의 공을 기리자는 취지로 맥아더 장군의 이름이 새겨진 인천에 ‘맥아더길’이 탄생했습니다. 소개 좀 해주세요.
A. 춘천에 근소양2교가 있는데 이 다리의 또 다른 이름은 ‘프랭크 포니 브릿지’입니다. 6·25 전쟁 중 전사한 프랭크 포니 대령의 넋을 기려 붙여진 이름이에요. 2000년 강원경찰청 차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조깅을 하면서 다리 앞에 붙여진 기념비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었습니다. 또한 제가 미국 FBI에서 훈련을 받을 때 건물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던 것이 임무수행 중 순직한 이들의 이름을 새긴 동판이었습니다. 미국의 존F케네디 국제공항, 프랑스의 샤를 드골 국제공항 등 선진국에는 우리 시대 위인들의 이름을 딴 공공시설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국가나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발굴해 도로나 교량, 건물 등을 그 이름으로 명명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긍정적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영웅과 위인 선양 사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한국자유총연맹을 통해 추진해온 첫 성과가 바로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길’입니다. 6.25전쟁 당시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한반도 역사의 방향을 바꾼 계기가 됐던 9·15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Douglas MacArthur)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맥아더길’ 명예도로를 지정한 것입니다. 앞으로 ‘맥아더길’이 인천의 대표적 랜드마크이자 관광도로, 그리고 역사교육의 현장이 돼 인천 시민의 애향심과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상징이 됐으면 합니다.
Q. 취임 첫 해 평가와 새해 각오는?
A. 최근 몇 년간 연맹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국민적 신뢰와 이미지가 실추돼 있었고 회원들의 활동도 많이 위축돼 있었습니다. 때문에 취임 당시 떨어진 연맹의 명예를 회복하고, 튼튼하고 강한 조직으로 탈바꿈해야겠다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위중한 임무였습니다. 경찰청장 당시 국회 인사청문회를 무난히 통과했고 철도노조의 불합리한 파업 관행을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 이렇다 할 흠결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연맹이 처해있는 상황을 고려했을 때, 회원들이 저에게 기대하는 바 역시 공정하고 깨끗한 조직으로 거듭나는 연맹의 개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취임 직후부터 조직 내에 만연한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지방조직 을 직접 찾아다니며 현장 위주의 조직 활성화에 앞장섰고, 본부와 지방 간 거리를 좁혀 유대관계 강화에도 힘썼습니다.
회계나 예산 집행에도 일체의 의혹이나 부정이 없도록 관리감독하며 뼈를 깎는 자정노력을 통해 연맹 개혁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연맹의 달라진 모습에 대해 주위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와 연맹의 뼈를 깎는 노력의 성과라 생각하니 뿌듯합니다. 다만 연맹은 NGO단체로서 주어진 일들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일을 찾아내야 하며, 예산 등 제반적인 여건에도 제약이 따르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 역시 무보수 명예직으로 일하고 있지만, 사재를 털고 시간을 내어 봉사하는 분들이 더욱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예산확보를 비롯한 제약조건들을 해소해 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새해에는 1000만 회원시대를 위해 국민 여러분들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적극 전개할 것이며, 회원들의 화합과 소통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바르고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활동에 더욱 매진하겠습니다. 병신년 새해에도 계획한 모든 일 성취하시고 국민 여러분의 변함없는 애정을 당부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