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우레시피 사라 리 공동 대표
글로우레시피(Glow Recipe)는 뉴욕에 본사를 둔 미국 회사다. 천연 성분에 기반한 화장품 브랜드들을 회사명과 동일한 이름의 웹사이트를 통해 판매하고 있다. 단순 판매 뿐 아니라 이들을 홍보하고 마케팅하며 다른 판매채널에 입점·유통하는 일 전반을 책임지고 있다.
국내 화장품업계가 글로우레시피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 회사가 한국의 화장품 브랜드를 기반 삼아 운영되고 때문이다. 즉 글로우레시피는 국내 화장품 브랜드들의 미국 시장 개척에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회사인 셈이다.
글로우레시피는 사라 리(Sarah Lee)와 크리스틴 장(Christine Chang), 두 명이 공동 창업했다. 둘 모두 한국 여성이다. 또 세계 최대 화장품기업인 로레알의 뉴욕 본사 근무 경력을 지니고 있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인 사라 리가 최근 한국을 찾았다. 미국 시장에 새롭게 론칭할 국내 브랜드를 발굴하고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같은 목적으로 1년에 두 세 번은 한국을 찾지만 이번 방문은 일정이 한층 촉박하다. 최근 미국 ABC방송국의 간판 프로그램인 '샤크탱크'에 출연하며 유명인사가 된 덕이다. 뉴욕발 비행기에서 막 내린 그녀는 국내 기자들과 만남의 시간부터 가졌다.
높은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다
그녀는 2004년 로레알코리아에 입사했다. 원래부터 화장품을 좋아했기에 적성을 살린 셈이다. 그것도 여성들에게 꿈의 직장이라는 글로벌 화장품 회사에 입사했으니 남부러울 게 없던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만족하지 않았다. 세계 1위 화장품 기업의 한국 지사를 넘어 본사에서 일해 보겠다는 야망을 품은 것이다. 목표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부단하게, 치열하게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꿈을 이뤘다. 로레알코리아의 한국인 직원 가운데 본사 발령을 받은 이는 그녀가 사상 처음이었다.
어린 시절을 홍콩에서 보낸 그녀는 영어가 유창하다. 때문에 뉴욕 근무 또한 한국과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짐작했다. 결론은 오판이었다. 같은 로레알이어도 한국 지사와 뉴욕 본사의 기업 문화와 운영 시스템은 판이했다.
같은 말을 쓰곤 있지만 인종과 국적이 다른 직원들 간의 인식 차이도 컸고 시장 트렌드와 작동 방식도, 소비자의 성향도 이전에 경험한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한국 지사 최초의 한국인 본사 발령자라는 사실에 자부심도 컸지만 그만큼 부담도 어마어마했다.
무엇보다 뉴욕의 업무량과 경쟁 강도는 서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화장실에 갈 시간조차 없는 정도가 아니라 화장실에 갈 생각 자체를 잊게 하는 긴장과 분주함의 나날이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악착같이 일에 매달렸다. 어려운 도전일수록 의욕이 불타올랐다. 화장품회사에 입사한 지 11년, 미국으로 넘어온 지 7년, 어느새 그녀는 로레알의 이사(Assistant Vice President) 자리에 올라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특유의 기질이 발동했다. 저명한 회사의 높은 직급, 갖은 복지 혜택과 안정된 삶 그리고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만류도 그녀를 멈추게 하지 못했다.
그녀에겐 오직 새로운 가능성으로 빛나는 'K-뷰티'만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오랜 파트너이자 친구인 크리스틴 장이 있었다. 둘은 과감히 로레알을 박차고 나왔다. 그렇게 2014년 11월 글로우레시피가 출범했다.
'K-뷰티'의 가능성 인정받은 방송 출연
주변의 우려가 들끓었지만 둘에게 있어 글로우레시피는 마냥 무모한 도전이 아니었다. 도합 20년 가까이를 화장품시장의 최전방에서 숱한 브랜드와 제품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고 다양한 업무를 섭렵하며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확신에 찬 선택을 한 것이었다.
"수 년 간 로레알에서 새로운 제품을 기획하고 개발할 때 마다 가장 먼저 눈을 돌린 곳이 한국 시장이고 가장 면밀히 분석했던 것이 한국산 화장품입니다. 로레알 뿐 아니라 내로라하는 글로벌 화장품회사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단언컨대 세계적으로 뷰티 트렌드가 가장 빠른 곳은 한국이며 가장 기술력이 앞서 있는 곳 또한 한국입니다."
사라 리 대표는 연간 75조원 규모의 세계 최대 화장품 시장인 미국에서도 한국 브랜드가 충분히 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미국 시장과 소비자들을 잘 이해하고 그에 맞는 접근 방식을 취한다는 전제하에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글로우레시피가 할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글로우레시피가 인큐베이팅하고 있는 국내 브랜드는 총 12개다. 사업 전개 방향이나 규모에는 제각각 차이가 있지만 글로우레시피는 이들 브랜드의 미국 지사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지난 1년간 글로우레시피의 사업 모델과 관리하는 브랜드들에 대해 현지 유력 매체들이 관심을 보이고 기사화했다. 덕분에 글로우레시피 사이트의 매출 실적은 일찌감치 안정권에 올랐다. 대형 유통업체들도 뭔가 달라진 한국 브랜드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LG생활건강의 빌리프를 비롯해 글로우레시피가 전개하는 브랜드들에 MD들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세포라에서는 'K-뷰티' 기획전이 열렸고 이에 맞춰 글로우레시피는 현지 소비자들을 위한 뷰티클래스를 마련했다.
압권은 ABC방송국의 투자 유치 오디션 프로그램인 '샤크탱크(Shark Tank)' 출연이었다. 스타트업 기업의 창업자들이 자신의 사업 모델을 소개하고 억만장자들이 그 가능성을 평가해 투자를 결정하는 이 프로그램은 현재 시즌7까지 이어질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글로우레시피의 두 창업자는 지난 4월 이 프로그램 출연을 신청, 거듭된 서바이벌 경쟁을 이겨낸 끝에 이달 초 최종 무대에 섰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인터넷 보안업체 헤이야비치(Herjavec) 그룹의 대표이자 미국 내 비즈니스 리더로 평가받는 로버트 헤이야비치로부터 5억 원에 달하는 투자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방송이 전파를 타던 날 둘은 직원들과 함께 사무실에서 차분하게 텔레비전을 지켜봤다. 글로우레시피 웹사이트의 방문자 수가 수직상승하기 시작했다. 미 전역에서, 캐나다에서, 영국에서까지 이메일이 답지했다. 유명 유통업체들 바이어들의 전화가 이어졌다. 로레알 본사 발령을 받던 날 이상의 짜릿함이 느껴졌다.
"투자 규모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사업 모델이, 무엇보다 'K-뷰티'의 가능성이 공인받은 것 같아 감격스러웠죠."
미국 시장 도전하려면 '오픈 마인드' 갖춰야
글로우레시피는 함께 신화를 이뤄갈 한국의 화장품 브랜드를 계속해서 찾고 있다. 제 1조건은 제품의 컨셉과 성분이 천연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미국 소비자들의 지향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미국 화장품시장은 전반적으로 정체된 상황이지만 유독 내추럴 스킨케어 분야만 높은 성장률을 구가하고 있다.
회사가 관심을 갖고 공을 들이는 부분이 연구·개발 분야라면 더욱 좋다. 미국 또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결국 좋은 품질을 갖춘 제품이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때문이다.
더불어 트렌드를 쫓기보단 나름의 확고한 철학과 스토리가 있어야한다. 현지 마케팅에 있어 차별화된 브랜드 컨셉은 필수라는 이유에서다.
이에 더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오픈 마인드'다. "한국 시장과 미국 시장은 엄연히 다릅니다. 중국과도 또 다르죠.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 운영 방향에 대한 신념은 좋지만 시장 여건과 환경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제아무리 커버력이 우수한 베이스 메이크업 제품이라 하더라도 각양각색의 인종이 모여 사는 미국에서 21호, 23호 단 두 컬러로 영업할 순 없는 일이다. 때론 이같은 당연한 사실조차 간과하는 브랜드들이 숱하다.제품이 좋은데도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현지화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브랜드들도 적지 않은 게 아쉽다. 그녀는 국내 브랜드의 미국 시장 론칭에 앞서 제품 이름에서부터 사용 설명서의 문구, 이미지까지 일일이 손을 보고 있다.
마케팅과 영업 분야 또한 마찬가지. 기존의 틀을 지나치게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다. "대부분의 한국 브랜드 관계자들은 '세포라에 입점할 수 있느냐'부터 물어요. 예전부터 세포라와 거래해왔고 세포라가 미국에서 가장 트렌디하고 큰 영향력을 가진 채널은 맞습니다만 세포라가 유일한 정답은 아닙니다." 브랜드의 컨셉과 타깃에 따라, 마케팅 전략에 따라 그에 맞는 채널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샤크탱크 방송에 출연한 날 사라 리 대표는 "패션하면 파리를 떠올리듯 사람들은 이제 뷰티하면 한국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해 투자자들의 관심을 환기했다. 비록 자신이 직접 한 말은 아니지만 이를 현실화하는 건 자신의 몫이라는,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