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와 한국 증시

입력 2015-11-23 15:25


[굿모닝 투자의 아침]


지금 세계는
출연 : 한상춘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Q >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김영삼 전 대통령은 27세가 되던 해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이후 14대 대통령(1993년 2월~1998년 2월)으로 당선 되어 김대중 전 대통령(15대 대통령)과 함께 양김 시대를 펼쳤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집권기 동안 제도 및 인프라적 측면에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사에 크게 기여했다.

Q > 집권 초기 '아시아 4용'으로 높이 평가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집권 초기 '아시아의 4용'으로 불리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일본의 자산거품 붕괴로 인해 대외여건이 악화되었고 주요 시장에서 수출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경제 및 국가경쟁력 강화대책 등을 추진하였으나, 집권 5년간 연평균 성장률이 5%대로 둔화되었다.

Q >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포기, 시장경제
김영삼 전 대통령은 경제개발 계획을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추진했으며, 정경분리의 원칙을 성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패를 척결하였으며, 하나회를 해체시켜 군부 재집권의 소지를 제거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투명하고 깨끗한 경제시스템을 구축하였다.

Q > 경제사회 전반에 만연된 부정부패 척결
당시 국내의 TI 부패도 지수는 발전단계 대비 최고 수준이었다. 이를 척결하기 위해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추진하였으며, 다음해 부동산실명제를 추진해 기득권의 반발이 심화되었다. 하지만 집권말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씨의 한보철강 비리가 발각되어 금융실명제의 의미와 평가가 퇴색되었다.

Q > 1990년대 들어 각국 경제 글로벌화 급진전
1990년대 우루과이 라운드(UR) 협상이 타결되어 세계무역기구(WTO)에 출범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우그룹 등 국내기업이 세계경영을 추진하게 되었으며, 외국기업의 한국진출과 국내로의 외자유입이 증가되었다. 결과적으로 국가의 이미지 개선 즉,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토대를 마련했다.

Q > 1996년 12월, OECD 29번째 회원국 가입
1996년 12월 OECD 가입 당시 국내의 경상수지적자는 약 230억 달러에 육박했으며, 태국 바트화 위기(1997년)의 전염효과가 예상보다 크게 작용했다. 또한 자본거래 자유화의 가속도로 인해 1997년 외환위기에 당면하게 되었다.

Q > 1998년 2월, 야당인 김대중 정부 출범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기 동안 발생한 외환위기로 인해 국민의 고통이 심화되었다. 이는 정권교체의 요인이 되어 야당인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게 되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집권 초기 국민 '금 모으기 운동'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하였다.

Q > 집권당시, 韓 증시, '동면기' 진입
1980년대 후반 국내 증시는 1,000p 기록한 이후 하락했으며, 커다란 정책추진으로 인해 정책 천수답 장세가 전개되어 국내증시의 기반은 약화되었다. 하지만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 등의 정책으로 인해 정경분리가 자리 잡게 되었으며, 국내증시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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