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익경 기자가 만난 세계의 건강한 한국인-21] '40년 외길의 요리명인(名人), 뉴욕(New York) 김원일 요리 연구소 대표 김원일 명인(名人)'

입력 2015-11-19 10:34


진짜가 나타났다. 바야흐로 먹는 것이 지상최고의 이슈가 되어가고, 요리 프로그램들이 방송가에 난무하는 요즘, 진가(眞假)를 판단하기란 여간 해서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생명과도 직결된 음식을 먹는 사람의 마음자세도 중요하지만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나 마음가짐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하겠다. 여기 요리의 근본과 요리의 혼(魂)을 이야기하는 40년 외길의 요리명인(名人), 뉴욕(New York) 김원일 요리 연구소 대표 김원일 명인(名人)을 만나본다.

문: 한국에서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계십니다. 한국에 계시면 오히려 부와 명예가 뒤 따르실 텐데, 모든걸 뒤로하고 미국에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저의 꿈은 세계적인 요리학교를 설립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요리를 배우고자 해외로 나가는 돈이 일년에 무려 1조 2천억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저 역시도 일본과 프랑스에서 갖은 고생과 수모를 겪으며 배웠고, 그런 저의 보물과도 같은 기술들을 집대성하여 70만가지의 요리의 레시피를 순수 저의 돈 35억을 들여, 100권의 책을 통해 세상에 모두 공개를 했습니다. 요즘 된장찌개하나도 공개안 하는 세상에 사람들은 대단하다는 놀라움 반면 바보스럽게 보기도하지만, 그것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세계적인 요리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정부기관에 엄청나게 출입을 했지만, 돌아오는 건 방대한 서류뭉치와 차가운 시선, 조소(嘲笑)였습니다. 그래서 장인정신과 다양성을 존중해주는 미국에 와서 한국인의 진정한 손맛을 한번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미국의 CIA(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 미국 최고의 요리학교)에 버금가는 요리학교를 만들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왔습니다. 제인생 후반전의 진검승부를 여기 미국, 특히 뉴욕에서 펼칠 것이며 그 시작이 제 이름을 건 '뉴욕 김원일 요리 연구소' 입니다.

문: 한국 사회 여러 분야에서 인재들이 국외로 빠져나가는데 무척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럼 요리에 입문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답: 인생에 요리를 만난 건 제가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저희 집은 어릴 때 목장을 했는데 그게 너무나 싫었습니다. 돼지, 염소, 오리 수 천마리, 도사견 등 동물들 키우기 위해 동이 트기 전부터 부산 온천장에 내려가 가서 잔밥을 모아서 먹이고, 어머니께서 염소젖을 짜서 우유를 끓여놓으면 그걸 아침에 다 팔고 학교에 갔습니다. 제가 집안일을 돕지 않으면 어머니께서 너무 고생을 하셔야 했기에 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요. 그러다 보니 학교에 가서는 자는 게 일이었고, 공부와는 담을 쌓게 되다 보니 선생님들은 저의 집안사정이나 환경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때리기만 했습니다. 자꾸 맞다 보니 성질이 날카로워 지고 엇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산에 나무 하러 다니면서 중학교 때 벌써 하루 두 세갑의 담배를 피우고, 싸움을 하다가 소년원에 가기도 하는 등 사고를 많이 쳤죠. 소년원에서 나와서 일년을 쉬면서 집안일을 돕던 중 동래 관광호텔에 아버지 심부름을 갔다가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모습을 보고, 내가 할 일이 바로 저거다라고 느꼈습니다. 아버지 친구분께 주방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혼만 내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 애원을 하니 그럼 다음날 새벽6시에 오라고 하더군요. 그건 저를 자포자기하게 할 려고 한 것이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새벽 6시에 갔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청소도 하고 기다리다보니 한명 두명 오기 시작했고, 그때 저의 임무는 연탄불을 올리고, 설겆이 하며, 주방장이나 선배들 신발,양말 빨래를 해주는 것이었지만 그게 좋았습니다. 학교는 실업계 공고였기 때문에 졸업반이고, 호텔로 실습을 빨리 보내줄 것을 요청해서 호텔주방에 허드렛일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해병대 356기로 입대했습니다. '인간개조의 용광로'라 불리는 해병대에 가서 많은 걸 배우고,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등 인생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신병동화교육기간에 연대작전본부 짓는 일에 투입됐는데, 워낙 어린시절 가축 막사 짓는 일을 하다 보니 누구보다 자신 있었고, 장교나 선임들이 저에게 모든 걸 맡겨서 저의 주도하에 무사히 작전본부를 지었고, 특급 휴가도 받았습니다. 휴가 뒤에 줄이 없으면 못 간다는 영농반에 발령을 받았는데 거기서도 지긋지긋한 오리 삼천마리 키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 편한 생활을 한동안 하던 중 간부에게 부탁하여 공수교육이나 IBS교육을 받게 해달라고 이야기하니 다른 사람들은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좋은 보직에 있으면서 미친 거 아니냐고 이야기하더군요. 저는 아랑곳 하지않고 계속 졸라서 보병부대에 배치 받고, 주계(취사)병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음식 만드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대 후 부산 코모도 호텔에 요즘으로 치면 5성급 호텔이었고, 99퍼센트가 일본손님들이었습니다. 거기서 보조로 일 하던 중 선임요리사가 자리를 비운사이 주문이 들어와서 할 수없이 제가 요리를 했는데 그 손님이 잠시 후 저를 부르더니 이것도 요리냐면서 화를 내더군요. 그때 욕을 먹으며, 내가 일어를 할 줄 알면 왜 욕을 먹는지를 알 수 있었지 않았나 하는 자괴감이 일어났고, 일어 공부를 시작했고, 일본손님들에게 가이드를 자청하며 부산,양산 등지를 다니는 대신 내가 발음이나 문법이 틀리면 수정해주도록 부탁해서 약 9개월만에 일본어를 마스터했습니다. 하루는 9개월전에 저를 욕했던 일본인이 호텔에 와서 저를 찾았습니다. 제가 일본어를 능통하게 하니까 어떻게 일본어를 하게 됐냐고 묻길래, 내가 너에게 욕을 먹어서 무슨 말인지 알고 싶어서 공부했다고 하니 반색을 하며, 그때와는 다른 태도로 저를 대해주었고, 그분은 시모노세키에서 보름에 한번씩 부산을 왔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보디가드겸 운전수로 같이 다녔는데, 어느 날 그분이 일본요리책을 선물로 주셨고, 그걸 받는 순간 일본요리를 공부하러 일본에 가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문: 일본으로의 유학또한 쉽지않으셨던걸로 아는데, 일본에서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답: 막상 일본으로 유학을 갈려고 하니 돈이 없어서 유조선회사에 일하는 사촌매형에게 부탁해 사우디에서 일본으로 기름을 실어나르는 LNG 운반선 주방에 2년간 근무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보름은 사우디, 보름은 일본 오사카에 정박하는 동안 '오사카 쯔지 조리사 전문학교'에 찾아가서 입학문의를 하고 상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법이 바뀌어 대학에서 1년이상 수료한 사람에 한해서 유학비자를 내주게 되었고, 저는 어쩔 수없이 부산의 성심외국어대학교(현. 영산대학교)에 입학시험을 봤습니다. 일어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다른 과목의 성적이 좋지 않아 입학이 안된다는 통보를 받고, 성심외국어대 학장을 찾아가서 일어에는 자신이 있으니 언어로 재평가를 꼭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한시간 가량 학장님과 프리토킹을 한다음 그 학과 꼴지로 입학을 허락받고, 1학년이 마칠때는 학과의 일등의 성적을 받았지요. 그후 제자신과 약속대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학교를 다니면서 생활비와 모자란 학비를 충당하고자 식당 아르바이트를 병행했습니다. 그때 시간을 아껴야했던 생활습관이 몸에 베여 지금도 하루에 3 자본적이 없습니다 . 일본에서의 생활은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고, 일본인들의 멸시와 차별속에서도 오직 마음속에는 요리로써 최고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그 모든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문: 일본의 조리학교나 고급 레스토랑 주방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또 일본인들에게 도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답: 일본의 조리학교는 그야말로 도제식 교육, 장인교육을 하고 있었으며 그 분위기는 엄격 그자체이며 굉장히 거칠었습니다. 요리하는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자잘한 잘못을 했을때는 칼이나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두드려 맞는 것은 예사였고, 맞고 나서도 오히려 감사 합니다 라고 이야기 했어야 했습니다. 제가 일본인들도 인정을 하는 것은 '실력'으로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보다 더 고민하고, 그야말로 마부위침(摩斧爲針: 도끼를 갈아 바늘로 만든다)의 마음으로 매사를 임하다 보니 일본인들의 인정을 받고, 존경하는 마음을 받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문: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많으실 텐데요?

답: 도쿄를 대표하는 레스토랑인 '퀸 엘리스'에서 일을 할 때였습니다. 참고로 그곳 대표는 이시나베 유타가라는 일본요리의 전설이자 인간문화재와 같은 분이시고, 저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전 일본에 40여군데의 레스토랑이 있고, 일년의 매출이 5천억이 넘습니다. 도쿄의 이시나베 선생 밑에서 일 할 때 였고, 어김없이 아침에 누구도 시키지 않는 허드렛일을 한 후 선생의 요리를 준비하기 위해 함께 야채를 다듬고 있을 때, 고양이만한 쥐 세마리가 주방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깜짝 놀랐고, 위생을 목숨처럼 여기는 일본인들이 어떻게 저런 거대한 쥐를 주방에 방치하는지 의아했지만 일단 저는 쥐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긴몽둥이로 냉장고 아래를 쑤셔 쥐를 나오게 한 다음 몽둥이로 후려쳤는데, 쥐는 꿈적 하지 않고 오히려 이빨을 드러내며 저를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순간 화가 나서 몽둥이를 버리고 주먹으로 쥐의 두개골을 박살내버려서 죽이고, 나머지 두 마리도 그런 식으로 잡은 다음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이시나베 선생 및 선배들이 저에게 감사의 표정과 더불어 저를 이지매(왕따)시키는 일 따위는 없어졌고, 그것이 이시나베 선생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 같고, 그 사건 후에 몇 단계 진급을 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에피소드는 한창 요리를 주방에서 하는데 지배인이 들어와서는 여자화장실이 넘쳐서 뚫는 막대기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가보니 화장실은 넘쳐나고 있었지만 홀에 20명이 넘는 직원들은 가만히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어쩔 줄 몰라들 했습니다. 저는 조리복을 벗고 화장실에 들어가 손으로 뚫기 시작했습니다. 변기를 뚫고 호스로 화장실 물청소를 깨끗이 하고 혹시 몰라 향수를 뿌리고 완전히 정리한 다음 손을 깨끗이 씻고 아무렇지 않게 주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요리도 요리지만 그러한 실천하는 모습들이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하고, 저의 진가를 알아가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지금도 그런 허드렛일을 하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배우는 자는 그런 과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문: 화려하고 멋진 것만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는 스토리이군요. 강한 파도가 강한 어부를 만든다고 하는데, 인생에서 강한 파도를 무수히 맞이하셨습니다. 가장 힘들 때가 언제였습니까?

답: 일본에서 각고수업을 마치고 귀구하여 수 십군데 호텔이며 고급 레스토랑에 이력서를 냈지만, 저의 경력들이 부담스러웠는지 아니면 아직 저 같은 사람을 받아들일만한 곳이 없었는지 취직이 안되더군요. 저는 일본에서 숱한 고생에 고생을 하며 배워온 기술을 한국에서 펼치지도 못한다는 생각과 가족들은 저를 보고 있는데 저는 취직조차 못한다는 무기력과 내 자신의 한심함 때문에 정말 눈물만 나고, 크게 좌절했습니다. 부산에서 술에 취해 이시나베 선생에서 전화를 하니 내일 당장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저는 짐을 싸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고, 거기에서 일을 다시 했습니다. 이시나베 선생은 저를 극진히 아껴주셨고, 나중에는 저에게 일본으로 귀화를 종용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내는 당신이 요리를 배워 한국에서 꿈을 펼치려고 한 것이지 일본사람 될 려고 한 것은 아니지 않냐며 극심히 반대를 했고, 선생에게 이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니 몇 시간을 그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꼼짝하지 않으셨고, 저도 옆에 서서 가만히 서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눈을 뜨시더니 참 아깝다 하시며, 그러면 당신께서 소개장과 돈을 줄 테니 프랑스로 유학을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그 점이 감사했고, 프랑스 리옹과 도빌 등지에서 요리를 배우고 일하는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에 와서 놀란 점은 프랑스 고급 레스토랑의 대부분의 총조리장들은 일본사람들이었습니다. 이시나베 선생 역시 프랑스 요리의 대가로 일본인들은 일찌감치 프랑스 요리에 일본식의 개성을 융합하여 그들만의 것으로 승화시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프랑스 요리가 전공이고, 일식은 부전공입니다.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요리(한식이라는 표현은 어폐가 있음)를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미셰랑 가이드'가 프랑스에 있는데 식당들 등급을 메기는 것이죠. 아이러니컬하게도 파리에 미셰랑 가이드의 별을 가진 식당이 3개밖에 없는 반면, 도쿄에는 50개가 넘습니다. 더 웃긴 것은 일본의 요리의 대가들은 그들의 평가를 받는 것조차 격이 떨어진다며 그들이 찾아온다고 해도 거절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일본친구들을 만나면 늘 역사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들이 저지른 만행은 반드시 반성해야 하고, 특히 일왕(日王)이 사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요. 반면에 배울것은 우리가 배워야합니다. 왜 그들은 100년이 넘는 기업이 수백개가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귀국하여 나름 성공을 거두고 저만의 요리학원을 설립했고, 도제식 교육으로 엄격하게 한다고 서약서까지 받고 학생들을 받았습니다. 요리야말로 종합예술이다 보니 저는 붓글씨뿐만 아니라 꽃꽂이, 어탁, 소학 등 교양 과목등을 가르쳤고, 엄격한 교육을 시켰습니다만 학생들의 머릿속은 빨리 기술을 배워나가 창업을 할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시간과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는 저의 커리큘럼을 못 받아들이고, 등록금 환불 소송을 걸더군요. 저는 분명 입학 시에 서약서까지 받았으나 저의 눈높이와 그들의 눈높이의 차이는 컷 던 것이지요. 나중에 제가 인정하는 4명의 제자를 일본에 보냈고, 제 아들도 일본의 유명 레스토랑에 취업을 시켰는데 하나같이 하는 소리가 선생님의 엄격함은 일본에 와서 경험해보고 비교해보니 정말 부드럽게 친절하게 알려 주신 거라고 감사하다는 말들을 하면서 한국에서 더욱 엄하게 혹독하게 하셔야 된다고, 그래야 한국의 요리문화가 바로 설 수 있다고 오히려 그 사람들이 분개를 하더군요. 요즘 아무리 선생의 지위가 떨어졌다고 해도, 자신들이 스스로 자청해 배우고자 들어온 학생들이 모여 법을 방패 삼아 선생에게 소송을 걸고, 수년을 키워서 세간의 이름난 요리사로 키워놓으니 그 부모는 아동학대를 했다며 소송을 걸고, 동종업계의 요리사는 그런 친구를 데려다가 자신의 집에서 일을 시키고, 윤리와 상도덕이 땅에 떨어진 자들에게 무슨 요리를 제가 가르치겠나 하는 한탄스러움과 근본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저의 경험과 기술을 전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더욱 뉴욕으로 건너오게 한 촉매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 충분히 그 심정을 이해합니다. 김원일 명인께서 말씀하시는 요리의 기본 및 요리의 혼은 어떤 것입니까? 저 같은 문외한들을 위해 설명을 부탁 드립니다.

답: 무릇 요리를 한다는 사람은 8가지의 기본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흔히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이라는 것은 죽음의 문턱을 세 번 이상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즉 자기 분야에 미친 사람을 경(境)에 도달했다고 하는데 그 경의 위에 영(靈)이 있습니다. 하나의 물체를 보면 수십만 컷트의 필름이 지나가는 것 처럼 나와야 합니다. 자동차에 미친 사람은 소리만 들으면 어떤 종류의 자동차인지 어디가 문제인지 등등 다 알아차립니다. 저는 칼을 쥐면 칼과 대화를 합니다. 그릇들과 생선, 야채 등과 말이죠. 생선을 잡으면서 대화를 합니다. '너를 지금부터 해부를 할 테니 너의 모든 것은 이제는 나에게 맡겨다오.'하면 생선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맡기고는 합니다. 이러한 '영'에 도달 할 려면 우선 엄청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생선의 경우 무얼 먹고 살며, 언제 기름이 끼는지, 알에서 부화 될 때의 과정 등의 생태학, 해부학, 영양학을 공부해야 하며, 생선을 잡을 때도 광어는 칼을 어떻게 대야하고, 방어는 방추형이라 이렇게 칼을 써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고등어,정갱이는 등이 푸르고, 몇 그램일 때 가장 맛이 있고 등 이런 것들을 모르면 절대 요리라는 단어를 쓸 수 없습니다. 이런 원리는 한국,일본,태국,중국 상관없이 모든 요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문: 정말 디테일 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군요. 비록 요리를 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큰 가르침으로 다가옵니다. 끝으로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답: 저는 미국에서 고급마트를 많이 가는데 요리할게 눈에 어마어마하게 보이고, 요리가 수 천가지가 떠오릅니다. 개인적으로 매년 책을 약2만불어치 보고, 서예를 수년간 해오며 추사 김정희 선생의 7대 제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요리사들도 공부 안 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요리의 역사나 유래를 손님에게 설명해주고, 어떻게 먹는지 보조를 해주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죠. 저의 지론은 손님이 50불 짜리 먹고 팁을 100불낼수있도록 해야 그게 요리다. 저는 팁을 500불을 받아 본적이 있다. 실컷 먹은 게 150불 정도였는데 가면서 '아무것도 아니지만 받아주십시오.'라고 하면서 주더군요. 요리가 엔터테인먼트의 하나로 자리잡고 대중화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요리를 너무 가볍게 여기고, 요리사들이 스스로의 요리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 외적인 것에 치중 하다 보면 본질을 놓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장인정신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겉보기엔 느린 듯해도 그길이 가장 빠른 길이란 걸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누구나 저의 인생처럼 살아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저같이 근본(根本)을 이야기하고, 무엇이 진짜인지를 보여주는 사람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장인터뷰 강효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