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익경 기자가 만난 세계의 건강한 한국인-14] ‘아파치 헬리콥터 조종사에서 비밀특수수사대(Secret Service Special Agent) 요원까지 유홍삼(Sam Yoo)’

입력 2015-10-22 09:31
수정 2015-10-22 09:49


문=미국에는 언제 이민을 오셨습니까?

답=제 나이가 8세때 가족 이민을 오게 됐습니다. 아버지께서 기술직으로 오시게 되었고, 미국에는 새 의자나 가구를 사는 것보다 대대로 물려받은 것들을 다시 고치고 수리해서 리모델링을 해주는 것이 훨씬 더 비쌉니다. 그런 기술을 바탕으로 이민생활을 했고, YMCA태권도 초창기 멤버로써 태권도장도 운영하셨습니다.

문=아파치 조종사로 미군에서 복무하셨는데, 어떻게 조종사로 선발되었는지요?

답=우선 대학 시절 ROTC를 했고, 졸업 후 앨리바마 주에 위치한 U.S ARMY 항공대 병과를 받았습니다. 육군 항공대는 육사에서 상위 10%, ROTC 2% 중 엘리트를 선발합니다. 되고 싶어 되는 것은 아니고요, 최상위 정예요원만을 선발하여 코브라나 아파치 조종을 하게 됩니다. 항공대를 마치고 조지아주의 하인스빌(Heinsville)의 미군 24사단의 hunter army air field라는 한국말로 하면 ‘기계화 보병단’정도로 해석이 되겠고, 거기에서 기병사단 헬기부대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문=그럼 헬기부대는 언제부터 근무를 했고, 어떤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답=헬리콥터로 비행 수색및 정찰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헬리콥터로 나무 위에 떠서 적진 노선이나 적위치를 파악하는 등의 역할을 하는데 우리는 사단장을 위한 부대로 사단장 직속부대였으며, 88년도부터 근무하여 소대장, 중대장을 역임했습니다.

문=전쟁에 참가한 적이 있으신가요?

답=걸프전이 발발한 당시, 90년도 7월에 사막전투부대로써 우리부대가 가장 먼저 이라크로 파병이 되었습니다. UN에서는 91년 1월 파병날짜를 줬으나 우리는 반년 앞서 아무것도 없을 때 이라크에서 땅파고 자면서 첩보수집 및 수색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모든 전쟁에서는 수색대가 가장 먼저 적진에 침투하여 첩보수집 및 적의 주요시설 파괴 및 요인암살, 교두보를 마련, 항공작전을 유도하는 등의 역할을 합니다. 미군에서는 헬리콥터부대 즉 제가 몸담았던 아파치부대가 미군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죠.

문=좀 더 구체적으로 헬리콥터(아파치)부대의 작전 상황을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답=우리는 작전수행시 아파치 헬리콥터 두대가 떠서 갑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비밀 부대이기 때문이기에, rescuer(구조부대)가 없습니다. 적진에서 작전 수행중 퇴로가 끊어지거나 돌이킬 수 없는 위급 상황에서는 군복 포켓에 알약이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은 아시겠죠? 그리고 수류탄모양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버튼을 누르면 불같이 쇳덩어리가 되어 폭발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걸 블랙박스에 넣고 헬리콥터를 완전히 터뜨리는 것입니다.

문=자폭하라는 말씀이군요. 숱한 전투에 참여하셨고, 전쟁의 비참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셨을 줄로 압니다. 기억에 남는 장면들을 회상하신다면요?

답=저희가 수행했던 것을 회상하자면, 적진에 일단 침투하면 상대방도 우리가 들어온 걸 감지합니다. 레이더 기지도 일부러 비워놓고 진짜 돌아가는 것처럼 위장을 하는데, 그런 경우에 미사일을 몇 방 쏘고 가만히 있고 반응이 없으면 착륙해서 들어가 육박전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주요 임무는 정보를 캐내고 폭파하는 것인데 안될 경우 Join air attack이라고 해서 공군을 부릅니다. 그리고 비행장을 접수한적이 있는데, 이라크군들이 비행장을 탱크로 둘러싸고 포를 쐈는가 봅니다. 그런데 이라크는 비가오면 빠질 데가 없어요. 비행장 주변이 뭔가 볼록거리며 올라오는데 폭파안된 포탄들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사막이라 저희가 목숨을 건진 셈이죠. 그외 UN의 지시로 이라크군이 쿠웨이트에서 철수 할 때 탄약차량이 폭파되어 수많은 희생이 있었고, 그 당시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Time지에 나오기도 했지요. 헬리콥터 부대가 가장 무서운건 사실 직사포나 대포가 아니라 날아가는 총알입니다. 전파 교란 장치가 있어 포들은 피할 수 있지만 날아가는 총알은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문: 전쟁 후 트라우마는 없으셨나요?

답: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 주변동료들이 귀국하여 많은 숫자가 이혼을 하더군요. 가정생활과 사회적응이 힘든 것이죠. 저는 신체적으로 작전수행하며 화학 공장을 폭파한 적이 있는게 그것이 아직까지 피부병으로 나타나고 있고, 지금도 꿈에 헬리콥터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저공 비행하다가 깨고는 합니다.

문=그럼 종전 후 귀국하여 계속 군에서 복무하셨습니까?

답=아닙니다. 92년에 제대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미군 장교는 세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방위군, 정규군(active duty), 그리고 육사나 해사 출신의 regular military 이렇게 세가지인데, 정규군의 경우 3,4년마다 재계약을 하고, regular military 경우 재계약(renew)없이 20~30년을 채울 수 있으므로 regular였던 저는 사표(전역신청)를 제출하고, 3년간 미국회사를 다녔습니다.

문=제가 듣기론 백악관에서 경호업무를 담당 하신 걸로 압니다. 클린턴 정부 때 임무를 수행하셨지요?

답=제가 이 질문에 답하기 앞서서 미국의 Secret Service Special Agent(비밀 특수수사대)를 말씀드릴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부서에 일단 들어가기 위해 신청을 하면 6~7년 가까이 백그라운드(배경)조사가 들어가고, 경쟁율은 10,000: 1에 육박합니다. 이 부서는 재무부(Treasure of the department)의 소속이고, 링컨 대통령때 남북전쟁을 하면서, 돈을 찍어내는 과정에 가짜돈이 횡행하고, 그런 것을 조사하는 역할을 했으며, 링컨 대통령이 암살 당하면서 본격적으로 생겨난 부서입니다. 대통령 경호업무는 저희의 업무 중에 한 파트입니다. 한국의 경호실과는 시스템이 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FBI과 같은 수사권을 갖고 있고, 주요 임무는 국내 경제를 흔들 정도의 금융사기, 국가간의 범죄 등을 조사하며, 대통령의 경호를 지원하는 역할을 합니다. 단, 대통령도 우리에게 개인적인 명령을 강요할 수 없고, 거부를 할 수도 있습니다.

문: 굉장히 생소한 부서인 것 같습니다. 좀 더 Secret Service Special Agency에 관해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답: 일단 특별수사대 요원이 되기 위해서는 1년에 걸친 특수훈련을 거칩니다. 제가 근무할 당시 24명의 중 20명이 변호사였고, 육군 대위 출신으로 제가 있었고, 해병대위 출신, FBI agent에서 넘어온 사람을 포함해서 모두 인텔리전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서는 세계에 다 나가있으며, 미국의 대도시에도 에이전시가 있습니다. FBI도 손 못대는 큰 범죄의 경우 이 부서에서 맡아서 하기도 합니다. 또한 비밀특수수사대 요원만 공포탄을 쏠 수 있는데 그것은 대통령을 수행하고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존F. 케니디 대통령 암살 사건 후 secret agency는 zero tolerance, 즉 완전무결함을 추구하며 한치의 실수도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본으로 임무를 수행합니다. 요원들의 실수나 부족함은 곧 국가의 존폐위기로 치닫기때문이죠.

문=훈련 과정 중에 특별한 무술교육은 받으셨나요?

답=무술 이라고 해서 따로 도복을 입고 훈련하지는 않았고, 무술을 잘하는 것과 임무를 잘 수행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주로 급소(weak points)를 타격하거나 실신을 시켜서 제압하는 등 실전에서 유용한 기술들을 많이 연마했고, combat martial art라고 해서 방안에 완전 무장한 거한들을 배치시키고 그들은 저를 때릴수만 없고 어떤 기술도 다 쓸 수있는데, 그 방안에서 그들을 제압하고 빠져나가는 훈련 등을 했습니다.

문=인생자체가 군인, 특수요원을 거치시며 국가에 충성을 다하신 것 같습니다. 왜 이런 어렵고, 위험한 길을 선택하고 걸으셨는지요?

답=저의 아버님께서는 예전 한국에서 북한을 넘나드시던 KELO부대 요원이셨습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국가관이 투철하셨고, 남자는 항상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아버님의 영향이 비록 미국에 왔지만 저를 그러한 길을 걷게 한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있어야 한다는 가풍이 저의 아들에게도 미쳐 아들 또한 미군에서 보안장교로 근무하며 아프카니스탄에도 파병을 다녀왔습니다. 미국의 상류사회, 지도층은 자신들의 자녀가 사관학교를 가고 전장에 나가는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러한 것에 높은 가치를 둡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뉴스를 통해 보면, 부자들이나 정치권의 자녀들은 어떻게서든지 병역을 기피할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서 한심스러운 생각이 많이 듭니다. 누구나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것은 하기 싫겠지요. 그러나 리더들이 솔선수범 하지 않고 돈 없고 백그라운드 없는 사람들만 등을 떠밀고, 그들만 고생해야 한다면 누가 리더의 말을 듣고 사회가 통솔이 되겠습니까? 이러한 인터뷰가 마치 영화처럼 화려한 저의 과거 이야기를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있어야 내가 있을 수있다는 의식과 한국사회의 리더들, 차세대 리더들에게도 메세지가 전해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현장인터뷰 강효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