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부터 유럽중앙은행(ECB)은 양적완화(QE)을 통해 내년 9월까지 매달 600억 유로, 총 1조 1400억 유로가 풀린다. 이는 채권매입 규모와 기간 면에서 모두 시장의 예상을 뛰어 넘는 것으로, 현재 ECB가 마이너스 수신금리를 채택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유동성 효과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3차 양적완화보다 더 클 가능성이 높다.
ECB가 미국식 QE에 나서는 것은 유로존의 경기부진과 물가하락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로존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작년 12월 전년 동월비 -0.2%를 기록해 디플레이션에 진입했다. 특히 유로 내 경제 취약국(bad apples)들이 높은 실업률로 인해 수요부진이 지속되고 있는 만큼 유효수요 창출을 위한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다.
ECB의 양적완화 정책 결정이 FRB의 양적완화와 마찬가지로 자산가격과 실물경기 회복에 도움이 될지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유로존의 현 경제여건을 감안할 때 실제 효과는 미지수다. FRB의 양적완화 추진 당시보다 유로존 내 국채금리 수준이 이미 낮게 유지돼 있어 국채 매입에 따른 실제 효과가 반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빠른 시일 내 유로 경기회복이 어렵다면 ECB QE의 궁극적 목표인 ‘디플레이션 탈피’도 상당기간 경과해야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로존의 소비자물가 상승률 변동요인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경제 성장률, 원유가격 변화율, 비원유 상품가격변화율 가운데 경제 성장률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리로서 관심이 되는 것은 'ECB의 QE로 풀린 돈이 어디로, 특히 한국에 얼마나 들어올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때문에 국내 증시에서는 오랜 만에 유로캐리 자금과 소피아 부인의 향방이 주목을 끌고 있다. 코스닥에 이어 지난 4년 동안 박스권에 갖혀 있던 코스피 지수가 한 단계 상향 조정되는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는 낙관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캐리 트레이드란 증권 브로커가 차입한 자금으로 주식과 같은 유가증권의 투자를 늘리는 행위를 말한다. 차입한 통화에 따라 엔캐리 트레이드 자금과 달러캐리 트레이드로 양분화 돼 왔으나 유럽재정위기 이후 유로캐리 트레이드 자금도 부쩍 증가하고 있다. 캐리 트레이드를 운용하는 주체도 엔캐리의 경우 ‘와타나베 부인’, 달러캐리의 경우 ‘스미스 부인’, 유로캐리의 경우 ‘소피아 부인’으로 차입국의 가장 흔한 성(姓)을 따 부른다.
역사적으로 차입국 통화별 캐리자금 흐름을 살펴보면 1990년대 중반 이후 캐리자금은 주로 엔캐리 트레이드를 주도하는 ‘와타나베 부인’이 활발하게 움직였다. 당시 제로 금리정책에 따라 엔캐리 트레이드 조건이 충족됐기 때문이다. 2012년 12월 아베노믹스가 추진된 이후 1990년대 중반과 비슷한 여건이 조성돼 오다가 올해 들어서는 다소 완화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달러캐리 트레이드를 주도하는 ‘스미스 부인’이 눈에 띠기 시작하면서 국제금융시장에서 주목을 받았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 한때는 달러캐리 트레이드가 엔캐리 트레이드를 웃돌 만큼 급증했다가 작년 10월 양적완화 종료 이후 눈에 띠게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유럽재정위기가 발생된 이후 유로캐리 트레이드 자금을 주도하는 소피아 부인의 활동도 눈에 뜬 적이 있었다. 최근에는 ECB가 미국식 양적완화 추진계획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유로화가 뚜렷한 약세를 보임에 따라 유로캐리 포지티브 트레이드 여건이 재차 형성돼 앞으로 소피아 부인의 향방이 가장 주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갈수록 유로 캐리 트레이드와 소피아 부인의 향방이 관심을 받는 이유는 유로화 가치가 추가적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ECB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올해 3월부터 매월 600억 유로의 자산매입을 통해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할 경우 유로화 가치의 추가 하락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랙시트’ 우려와 관련해 그리스 집권에 성공한 치프라스 신임 총리가 앞으로 어떤 방안을 선택하느냐도 유로화 가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현재 치프라스 그리스 신임 총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유로존에서 탈퇴하는 ‘그렉시트(Grexit?Greece+Exit)'와, 다른 하나는 그대로 잔존시키는 ‘G-유로(Greece+Euro)' 방안이다.
이중 ‘G-유로’는 외형상으로 그리스를 유로존에 잔존시키면서 독자적인 경제 운용권을 주는 방식이다. 이때 그리스와 같은 경제 취약국은 수렴조건에 구속되지 않으면서 위기를 풀어갈 수 있고, 독일 등 경제 핵심국은 구제금융 부담을 덜 수 있는 ‘윈-윈 방식’으로 ‘그렉시트’보다 현실적이다.
치프라스 총리도 이 방안에는 동조하고 있으나, 그렉시트 우려가 높아지는 것은 구제금융 수용조건인 긴축을 이행하지 않을 가능성 때문이다.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취약정도가 심한 회원국일수록 재정긴축에 따른 GDP에 미치는 타격이 심하기 때문에 트로이카(EU·ECB·IMF)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 예측기관들은 유로화의 약세 흐름이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유로화 환율전망과 관련해 가장 보수적으로 보고 있는 영국의 경제전문지인 이코노미스트가 내놓은 ‘올해 세계경제전망(The World in 2015)'에서는 등가수준(1유로=1달러)까지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올해 3월부터 ECB의 양적완화 정책에 따라 자금이 본격적으로 풀릴 경우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유로 내에서는 독일로의 ‘쏠림 현상(tipping effect)’, 시중에서 아예 빠지는 ‘퇴장 효과(hoarding effect)', 유로존 밖으로 이탈되는 ‘누수 효과(drain effect)'다.
캐리자금의 성격이 강한 유로 밖으로 이탈되는 자금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유로 역외국, 대만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지역으로 마치 부채살처럼 흐트러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이런 조짐을 올해 1월말 ECB의 양적완화 정책 발표 이후 글로벌 자금의 움직임을 보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유로화를 조달해 원화자산에 투자할 때 얻을 수 있는 수익을 보여주는 유로?원 캐리 트레이드 지수도 상승하고 있는 점이다. 수치가 높을수록 유로화 자금이 우리에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유로-원 캐리트레이드 지수는 지난달에는 14년 이래 최고수준까지 상승했다.
이는 양적완화 확대로 유로화 조달비용이 낮아진 반면, 우리나라는 기준금리가 2%로 상대적으로 높은데다 막대한 경상흑자 외환보유액으로 환차익까지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는 원화가 가파른 약세를 보이면 환차손을 볼 수 있지만, 한국의 경우 안정적인 외화안전망으로 원화 가치가 급락할 가능성이 낮다.
캐리트레이드 자금의 유입은 양날의 칼이다. 자금이 국내금융시장에 유입된다는 측면은 긍정적이나 과도하게 유입되면 시장 혼란기에 급격히 이탈돼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특히 캐리트레이드 자금은 투기성격이 짙기 때문에 국제금융시장이 출렁일 때 대외환경에 크게 의존하는 우리 경제는 의외로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선제적인 대책이 필요한 때다.
<글. 한상춘 <a href=http://sise.wownet.co.kr/search/main/main.asp?mseq=419&searchStr=039340 target=_blank>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 객원논설위원(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