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한석규 분)와 사도세자 이선(이제훈 분)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비밀의 문’에는 딱히 응원할 대상이 없다.(사진 = SBS)
방영 전 ‘비밀의 문’은 하반기 최대 기대작이라는 평까지 받았었다. ‘뿌리 깊은 나무’의 한석규, ‘건축학 개론’의 이제훈, ‘하얀거탑’의 김창완이 중후한 사극으로 격돌한다는 설정이니 ‘정도전’을 잇는 하반기 대표작이 될 거라는 기대가 모아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시작된 후엔 시청자의 반응이 싸늘하다. 만듦새 자체는 그리 떨어지지 않지만 호응이 나타나지 않는 게 문제다. 이 작품은 지속적으로 ‘백성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군주’를 강조하면서 최근 ‘명량’, ‘정도전’ 등에 나타난 사극 리더십 열풍을 이어가려 한다. 그런데도 왜 시청자의 반응이 안 좋은 걸까?
이 작품은 한 화원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는 사도세자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살인을 교사한 건 노론의 수장이고, 그 사건을 덮으려는 자는 영조였다. 비밀의 문을 열어젖힌 사도세자는 결국 노론과 영조의 역린을 건드리게 된다. 제작진은 이런 설정을 통해 사도세자를 재평가하고 영조가 왜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초기 사도세자 주위엔 우군이 없었다. 사도세자의 충신이자 훗날 정조의 충신이 되는 채재공 단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믿지 못할 사람들이다. 노론은 그들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도세자를 당연히 적대시하고, 아버지인 영조는 툭하면 선위파동을 일으키며 아들을 시험하는가 하면, 소론은 사도세자를 자신들의 집권을 위해 이용하려고만 한다.
모두가 썩어버린 거대 기득권 집단과 싸우는 주인공, 혹은 누구 하나 믿을 사람 없는 처지에서 백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익숙한 구도다. 올 여름 ‘거족적’ 흥행을 일궈냈던 ‘명량’도 이런 구도였다. 이 영화 속에서 이순신 장군은 왜적은 물론 아군조차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홀로 전투를 치렀고, 바로 그런 설정 때문에 관객이 더욱 열광했다. 작품은 반역을 하지도 않았던 배설을 반역자로 만들면서까지 이순신을 고독한 처지로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 적과 아군 모두로부터 공격 받으면서도 오로지 백성을 살리기 위해 분투하는 주인공을 그린 것이다.
사도세자역의 이제훈도 그렇게 분투하는데 왜 시청자의 응원이 나타나지 않는 걸까? 바로 이 지점에서 ‘명량’과 ‘비밀의 문’이 갈렸다. ‘명량’은 관객이 응원할 만한 주인공을 제시해줬다. 반면에 ‘비밀의 문’에는 딱히 응원할 대상이 없다. 그저 꽉 막힌 상황이 답답할 뿐이다.
‘비밀의 문’에서 비밀의 열쇠가 되는 것은 ‘맹의’라는 문서다. 이것은 노론의 경종 암살모의를 담은 연판장인데, 바로 여기에 영조의 서명이 들어있다. 경종의 이복동생으로 왕세제였던 영조가 노론의 반역에 가담해 형을 죽였다는 증좌인 셈이다. 이 원죄로 인해 영조는 노론에게 휘둘리며 탕평책이나 균역법 등 기득권 구조를 깨는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한다. 영조는 맹의의 비밀을 완전히 묻어버리고 개혁정책을 펴려 한다.
시체로 발견된 화원은 바로 맹의의 비밀을 아는 자였다. 사도세자가 그 사건을 캐면서 맹의에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것이 초반 내용이었다. 이때 시청자가 사도세자를 응원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비밀에 다가갈수록 위협감을 느낀 영조가 노론과 가까워지면서 개혁이 오히려 후퇴하기 때문이다. 개혁을 꿈꿨던 영조는 위기의식으로 인해 점점 왕권에만 집착하는 인물이 되어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사도세자가 영웅이 아니라 공연히 들쑤시고 다니면서 일을 키우는, 앞뒤 분간 못하는 청소년처럼 인식됐다.
영조 한석규의 경우엔, 감정이 널뛰며 자신의 안위에 집착하는 냉혹하고 이기적인 캐릭터로 그려졌기 때문에 시청자의 몰입을 유도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다혈질의 캐릭터가 ‘뿌리 깊은 나무’하고도 겹쳐 식상함까지 초래했다. 한국 사극계의 공적으로 자리 잡은 노론은 말할 것도 없고, 당리당략만 따지는 소론에게도 감정이입이 어려웠다. 결국 시청자가 누구도 응원할 수 없는 극이 탄생한 것이다.
거기에 한석규의 캐릭터는 홀로 너무 뜨겁고, 김창완에겐 노론의 수장이라 할 만한 무게감이 부족해 불꽃 튀는 연기격돌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도세자를 돕는 민간 탐정역의 소녀 지담은, 왜 그녀가 가족과 지인들 전체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타인의 사건에 몰두하는지가 설득력 있게 표현되지 않아 역시 몰입이 어려웠다.
일부 소론 강경파와 지담의 아버지가 진실에 목을 매며 영조에게 항거하는 것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왕조시대에 중요한 건 왕이 얼마나 백성을 위해 좋은 정치를 하느냐이지, 왕위 승계 과정의 진실 따위가 아니다. 이들은 진실을 지상선으로 내세우며 영조의 개혁정치를 압박했다.
드라마 중반 이후에도 이상한 설정들이 이어졌다. 왕조시대에 왕권을 뺏는 일은 오로지 힘으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일부 강경파와 지담의 아버지, 박문수 등은 진실만 드러내면 영조를 끌어내릴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하다 죽어갔다.
효가 절대가치였던 조선에서 사도세자가 왕위 승계과정의 부정을 밝히라며 아버지를 압박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박문수가 아무 대책 없이 사도세자를 맹의의 비밀로 이끄는 것도, 무작정 영조에게 선위를 압박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의 행동 때문에 영조는 더욱 왕권에 집착하게 됐고 사도세자는 점점 위험으로 끌려들어갔다.
백성을 위한다는 민간 비밀결사는 영조를 적으로 설정해 결국 기득권 사대부를 도와주고 있기 때문에 공감받기 어렵다. 소론은 좋은 세상 타령을 하며 자기들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영조로 인해 얼마나 나쁜 세상이 왔는지 영조를 밀어내면 어떻게 좋은 세상이 온다는 건지 그 내용이 전혀 없었다.
공감도 어렵고 이해해주기도 어려운 캐릭터, 설정, 스토리전개가 난무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영조에 반하는 인물들이 말로는 백성을 위한다면서, 위민정치하려는 영조를 위협해 노론천하형성에 일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왕위승계과정의 진실 따위보다 왕이 어떤 정치를 하느냐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극중 인물들이 진실만을 절대화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극중에서 선한 인물들이 처참히 죽어가는 나름 클라이막스 장면에서조차 시청자들은 ‘왜들 저러는 걸까?’라며 남의 일처럼 보게 된 것이다. ‘비밀은 문’은 시도는 좋았지만 내용이 아쉬웠던 작품이 될 듯하다.
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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