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마치자 대뜸 “고맙습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카페 가득 울려 퍼진다. 배우 송상은과의 유쾌한 인터뷰가 끝날 즈음 들려온 소리였다. 그는 “오랜만에 뮤지컬 배우라는 것을 자각하게 됐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 마냥 따뜻한 인사였다.
송상은은 뮤지컬 ‘그날들’ 앙코르 공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제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그는 누구보다 바삐 움직인다. 덕분에 인터뷰 시간은 1시간 앞당겨졌고 예상시간보다 빠르게 마무리 지어졌다. 그럼에도 인터뷰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긍정의 아이콘’ 송상은과 함께 그의 배우 인생을 한 걸음 한 걸음 되짚어봤다.
친구 같은 가족, 든든한 지원군
송상은의 이야기 첫 페이지는 ‘가족’으로 채워진다. 가족관계는 단출하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외동딸이 전부다. 외동딸은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지만 형제가 없어 외로움도 쉽게 탄다. 송상은은 어땠을까. 그는 “서로가 친구 같다”며 외로움을 느낄 새조차 없었다고 털어놨다. 서로가 서로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가족이라는 자부심은 그의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배우가 되고자 결심했을 때도 가족의 지지는 큰 힘이 됐다.
“반대는 없었다. 워낙 부모님이 이 일을 좋아하다 보니 반대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거 정말 힘든 일이다’라며 괜찮은지 물어보더라. 제가 괜찮다고 말하니 그제야 그럼 하라며 승낙했다. 그때부터는 전폭으로 지지해줬다. 학원도 보내주고 연기 코치도 해줬다. 오디션을 본다고 하면 ‘거기는 이렇게 해보는 게 어때?’라며 연습 방향을 잡아줬다.”
작품을 선택할 때 부모님의 의견은 항상 1순위였다. 송상은은 자신보다 “30년은 더 산 분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알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모님은 해가 되는 조언을 할 리가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때로는 그 선택이 아쉬움을 남기더라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 역시 성장을 위한 한 시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는 흥행배우가 아니다. 주로 마니아층이 많은 작품을 해왔다. 부모님 말씀을 따라 작품을 선택해 손해 본 적은 없었다. 물론 더 좋은 작품이 들어왔는데 이 작품을 선택해 놓친 경우도 분명 있다. 그럴 때도 이 작품을 하게 돼서 배우는 것이 있고, 얻어 가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 하나하나가 배우로서 커 나갈 때 분명 도움이 된다.”
혼자만의 공간, 눈물을 삭히는 시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아련히 그리워지는 공간이 있다. 해맑게 웃으며 뛰놀던 놀이터,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던 방과 후 교정, 매콤한 떡볶이가 유혹하던 분식집, 재미난 게임이 가득했던 문구점까지 추억 속 그곳은 이제는 닿을 수 없어 더욱 애틋하다. 송상은에게 ‘방’이 그렇다. 집 안에 또 다른 집이었다. ‘방’은 혼자만의 공간이자 눈물을 삭히는 송상은 만의 아지트였다.
“엄마는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아빠는 서재에서 책을 본다. 저는 제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음악을 듣는다. 각자 따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다 저녁 시간에 거실에 모여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눈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 각자 방에 다시 들어가 쉰다. 방에 들어가면 혼자 사는 집에 온 느낌이다. 어릴 때 남들 앞에서 우는 것을 싫어해 방에서 몰래 많이도 울었다. 어린아이였는데도 자존심이 세서 남들 앞에서는 절대로 울지 않았다. 제가 울면 엄마, 아빠가 속상해하니까 더 못 울었던 것 같다. 그래서 침대 옆에 쭈그려 앉아 울었다. 거기에 앉아 있으면 아무도 못 찾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컴퓨터는 어린 시절 송상은의 단짝 친구였다. 컴퓨터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었다. 드라마를 보는 것은 물론이고 음악을 듣고 친구들과 대화도 할 수 있었다. 만능 친구 컴퓨터는 언제나 송상은 기억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웃음 짓게 했다. 노래는 컴퓨터만큼이나 송상은과 친한 친구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즐겨 불렀다. 동요보다 가요를 먼저 접한 그였기에 노래방은 제2의 방으로 급부상했다.
“노래 부르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노래방도 자주 갔다. 덕분에 선생님께 많이 혼났다. 집에서는 아마 제가 노래방을 그렇게 다니는 줄 몰랐을 거다. 엄마 지갑에서 만 원씩 빼서 노래방에 갔었다. 저는 엄마가 모르는 척해준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물어보니 정말 몰랐다고 하더라.(웃음)”
학창시절, 똑순이 노래에 빠지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송상은은 쉼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막힘이 없었다. 술술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정신을 놓고 빠져들게 했다. 그의 학창시절은 뜨거웠다. 목표 의식이 뚜렷했고 달려가야 할 길이 분명했다. 그는 매사에 거침없이 달려드는 말괄량이 소녀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 역시 그녀의 목표 의식을 강하게 고취시켜준 인물이다. 인정받고 싶은 열망은 오기를 자극했고, 송상은을 성장시켰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이었던 이건복 선생님이 기억난다. 굉장히 무서운 선생님이었다. 그해 제 목표가 선생님께 잘 보여 칭찬을 받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칭찬에 인색했고 원리원칙, 완벽주의자였다.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지각도 안 했다. 상을 탈 수 있는 대회가 열리면 무조건 나가서 상을 받아 왔다. 결국 졸업할 때 ‘잘했어’라는 말을 들었다. 1년이 지나고 보니 마음이 참 따뜻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선생님이 전근 간 학교도 몇 번 찾아간 적이 있다.”
송상은은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시험기간에만 공부하고 평소에는 노래하던 아이”라고 자신을 평했다. 그는 중학교·고등학교 내내 노래를 부르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평소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고 수능 역시 잘 보지 못했다. 대학은 수능 성적이 아닌 내신으로 들어갔다. 잘하지는 않아도 꾸준히 하는 성격이 제대로 빛을 발휘했다. 적절히 성취욕을 불러일으킬 만큼의 달콤한 열매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수능은 거들 떠보지도 않았다. 대신 내신은 무조건 잘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부모님에게 재미있는 내기를 제안했다. 예를 들어 ‘내가 전교 15등을 하면 얼마를 달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목표가 생겨야 열심히는 아니어도 꾸준히 한다. 시험기간이 되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부했다. 용돈 벌이가 제법 쏠쏠했다. 제일 좋은 성적을 받은 것은 전교 15등이었다. 전교생이 몇 명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웃음) 졸업할 때는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노래가 있어 학창시절은 흥겨웠다. 신났다. 즐거웠다. 송상은은 중학교 때 밴드 생활을 시작했다. 밴드는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하며 학창시절을 푸르게 물들였다. 그는 “학교를 빠지는 스타일이 아니다. 학교에서 공부는 안 해도 그냥 와 있는 학생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공부보다 노래에 흥미를 느꼈고, 그만큼 밴드 생활에 빠져들었다.
“밴드부가 대회에 나가면 학교를 빠질 수 있었다. 학교를 빠지기 위해 대회란 대회는 다 나갔다. 그렇게 살림살이를 제법 장만했다. 동아리방은 학교 지하에 있었다. 우리가 밴드부 1기였기 때문에 동아리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상금을 받으면 앰프를 사고, 또 상금을 받으면 드럼을 샀다. 1년 동안 동아리방을 알차게 꾸몄다. 아쉬운 것은 밴드부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가봤는데 밴드부가 없어졌더라.”
아쉬움은 당연한 결과다. 애지중지 채워 넣은 동아리방은 고스란히 송상은의 학창시절 추억이 됐다. 친구들과 함께 페인트칠하고 쓸고 닦아 만든 동아리방이었다. 없어졌다는 소식은 청천벼락과 같았다. 처음부터 완벽했더라면 이렇게 아쉬움이 크지는 않았을 테다. 완벽하지 않은 친구들이 모여 완벽을 향해 달려갔기에 아쉬움은 상당하다.
“처음에는 예선도 통과하지 못했다. 기타도, 베이스도, 드럼도 모두 처음 배우는 친구들이었다. 대회에 출전하는 다른 밴드부는 정통 있고 실력도 있었기 때문에 비교가 안 됐다. 하다 보니 오기가 생겼다. 안 되겠다 싶어 매일 밤늦게까지 연습했다.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이 지금도 제일 친한 친구들이다. 매년 같이 여행도 가고 한 달에 한 번씩 꼭 만나 회포를 푼다. 그래도 졸업할 때는 꽤 괜찮은 밴드부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