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사람이 모이진 않았지만 몰도바 코우셴 시청 앞 광장에선 종종 문화행사가 열리곤 했다.(사진 = 이기호)
나름 운치가 있고 사람들은 친절했지만 키시네프에 비해 코우셴은 낡고 초라했다. 수도 키시네프는 몰도바에서 진짜로 최고의 도시였다. 그런데 나는 코우셴에 미처 적응도 하기 전에 인근 도시 벤데르(Bender)를 방문하게 됐다. 도시 옆을 흐르는 깨끗한 강물이 인상적이었고, 도시 수준은 코우셴보다 높았지만 키시네프에는 약간 미치지 못했다.
여기서 잠깐. 소련연방에서 분리한 몰도바 내부에는 또 다른 분리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몰도바가 루마니아와 재통합할 가능성을 우려한 남부 터키계 가가우즈(Gagauz)는 자치권을 확보하며 잠잠해졌지만 진짜 문제는 트랜스드니에스트르(Transdniestr) ‘공화국’이었다.
몰도바가 소련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러시아계였던 트랜스드니에스트르(이하 드니에스트르) 당국은 몰도바공화국 탈퇴를 결정했고, 양측은 군대를 동원해 유혈사태를 벌였다. 이 내분으로 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코우셴과 드니에스트르 지역의 주요도시 중 하나인 벤데르에는 당시 전쟁에서 사망한 이들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설치돼있었다.
1997년 10월초, 코우셴에 도착하자마자 짐도 풀지 못하고 방문한 곳이 벤데르였지만 입국한지 얼마 안 된 나는 몰도바 중앙정부와 드니에스트르의 갈등을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트랜스드니에스트르라는 명칭도 지금까지 익숙하지 않다. 다만 드니에스트르의 수도인 티라스폴(Tiraspol)은 간간히 들어봤던 도시였고, 벤데르는 매우 친숙한 도시다.
▲ 코우센 시내에 설립된 전쟁희생자 위령탑. 몰도바 내분 시절 트랜스드니에스트르와의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왼쪽) 트랜스드니에스트르 지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벤데르 지역의 젊은이들(사진 = 이기호)
드니에스트르에 대한 무지는 현실 앞에서 곧 극복된다. 소총을 소지한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를 거치다보면 누구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할 수밖에 없다. 좀 겁난다. 나를 벤데르로 데리고 간 마이클은 원래 드니에스트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비자가 따로 필요하다고 했지만 그건 몰도바인들도 마찬가지였고, 사실상 ‘무비자’가 묵인되고 있었다.
대통령도 따로, 화폐도 따로… 몰도바의 다른 몰도바
드니에스트르는 당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정말 이상한 지역이었다. 분명 몰도바였는데 일단 화폐가 달랐고 정부가 따로 있었다. 지방정부인지 물었지만 벤데르 청년들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몰도바 중앙정부나 몰도바 대통령에 대해 묻자 이들은 자신들은 대통령이 따로 있다고 했다. 아마 이고르 스미르노프(Igor Smirnov)였던 것 같다.
대부분 상점은 텅텅 비었지만 벤데르는 코우셴에 비해 훨씬 깨끗하고 시설도 좋았다. 가정집들도 코우셴에 비해 크고 여유가 있었으며 특히 젊은이들의 복장에서 상대적 부유함이 느껴졌다. 앞으로 코우셴에서 살게 됐다고 하니 “그런 후진 동네에서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며 애틋한 눈빛으로 벤데르로 이사할 것을 권한 여중생도 있었다. 살짝 웃음이 나온다.
어차피 코우셴이나 벤데르나 50보 100보의 차이일 뿐 미국이나 한국에 비해 생활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기왕 타지에서 고생할 바엔 좀 더 거친 환경이 나았고, 총을 들고 러시아인 특유의 매서운 눈빛으로 차안을 들여다보는 지역에서 속 편히 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 대머리 노총각 마이클의 도움으로 거의 매주 일요일에 벤데르를 방문할 수 있었다.
벤데르에서는 3살짜리 보바(Vova)네 집에 주로 머물렀다. 총각이던 보바의 아버지는 연상의 이혼녀와 결혼해 보바를 낳았고, 부인이 데려온 10대 후반의 예쁜 딸도 있었다. 들어 보였지만 몇 살 차이가 나지 않아 “형님”으로 불렀는데 정이 많아 친동생처럼 대해줬고, 나중에 내가 한국으로 떠날 때 내 얼굴을 새긴 비석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는 비석조각가였다.
한 번은 벤데르에서 공원묘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젊은 청년들이 묻혀있는 무덤에는 어김없이 그들의 생전 모습이 조각된 묘비가 있었고, 묘비에 적힌 사연도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많았다. 한 국가 내의 민족 간 갈등이었으니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은 아니었지만 독립한지 얼마 안 된 작은 나라에서 참 많은 아픔을 지니고 산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 The Circus. Built in 1981. Architects S. Shoikhet and A. Kirichenko(사진 = 이기호)
러시아대통령 다음엔 몰도바대통령, 1시간 간격 새해맞이 2번
여학생은 14살이면 대개 성숙해진다. 첫 성경험을 하는 평균나이가 14세라는 말도 있었다. 대학1년 과정 학생들은 수업 중에도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교사월급이 25달러 정도인 어려운 나라. 그래서인지 이들에게 일본인, 한국인은 1등 신랑감이었다. 수업 도중 야한 복장의 10대들이 간간히 대시해왔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절제력(?)이 필요했다.
벤데르와 코우셴을 불문하고 몰도바는 러시아문화권에 있는 국가답게 크리스마스를 1월 7일로 기념하고 있었고, 새해맞이 대통령의 신년메시지 발표도 시차에 따라 모스크바시간으로 러시아대통령이 먼저 한 번, 1시간 뒤에 몰도바시간으로 몰도바대통령이 한 번씩 했다. 물론 채널은 달랐지만 몰도바사람들은 채널을 바꿔가며 1998년 새해를 2번이나 기념했다.
몰도바에는 정확한 기준이 없다. 1997년 여름 1개월 16달러였던 비자연장비는 그해 가을 3개월 130달러로 올랐다. 이유는? 없다. 그냥 그렇다. 한국에 편지를 부칠 때도 키시네프는 0.9레이(당시 4.5레이가 10달러 정도), 코우셴은 1.5레이였다. 왜 다른지 물어보면 키시네프까지의 추가요금인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에 보낼 때는 키시네프와 코우셴이 같다.
집전화가 불통돼서 전화국에 수리를 요청해도 3주가 넘도록 끄떡하지 않는다. 전화국 직원은 몰도바의 국가번호도 모른다. 관심도 없고 외국인이 물어봐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당시 코우셴에서 인터넷 사용자는 노트북을 가진 내가 거의 유일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듬해 미국인 친구 닉의 사무실에서 이메일을 사용하긴 했다.
다시 드니에스트르로 돌아가 보자. 풍족했던 소련통치 시절을 그리워했던 드니에스트르는 유혈충돌 당시에도 러시아의 비공식적인 후원으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었다. 인구의 3분의2가 몰도바-루마니아인인 몰도바에서 13%에 불과한 러시아인이 여전히 자존심을 고수하면서 살고 있는 곳. 이방인의 눈에도 몰도바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꽤 많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