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토피한의원을 개원해 아토피치료를 한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진료를 보다 불현듯 예전 기억이 떠오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3년 정도 보건소에서 진료를 본 후, 대학원에 다닐 때였다. 그때는 청담동의 모 한의원에서 다양한 질환을 진료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아토피피부염을 접할 기회가 생겼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그 환자는, 처음에는 아토피피부염이 아닌 다른 증상으로 필자에게 치료를 몇 번 받았었다. 통증질환이나 내과질환이 잘 치료되자 나중에서야 가려두었던 본인의 피부를 보여주며 아토피증상을 치료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아토피피부염이 워낙 심하고 오래돼 치료를 포기하고 있었으나 본인의 다른 질환이 잘 치료가 되고, 마침 치료받던 다른 아토피피부염 환자가 좋아지는 것을 보자 치료를 시작할 결심을 했다고 했다.
처음 그 환자의 피부를 보고 증상의 심각함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지금 다시 그 환자를 만난다면 웃으면서 치료를 해 주겠지만, 그때는 아토피질환을 많이 치료해보지 않았던 까닭에 상처투성이의 몸을 보고 나자 치료할 자신이 없어졌다.
의사가 환자를 보고 자신이 없다면 치료를 시작하기는 힘들다. 환자에게 필자의 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했고, 그 환자는 풀이 죽은 모습으로 집에 돌아갔다.
시간이 흘러 학회를 통해 프리허그한의원 잠실본원의 박건 원장을 만나게 됐고, 아토피질환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불현듯 그때 치료해주지 못한 환자가 생각났다. 박건 원장에게 부탁해 집필 중이던 아토피혁명의 파일을 읽게 됐고, 아토피치료에 희망이 생겼다. 그 희망으로 아토피피부염에 대한 공부가 시작됐다.
시간이 가고 아토피피부염 공부가 쌓여가면서 아토피질환에 대한 정체성이 눈앞에 드러났고, 치료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자신감으로 겁도 없이 서초 한복판에 아토피한의원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는 친하지도 않았던 박건 원장을 믿고 함께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중증의 아토피피부염을 접하고 치료를 시작조차 해보지 못했던 예전의 기억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기억이 필자로 하여금, 박건 원장과 함께 아토피한의원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달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지금도 아토피질환에 대해서는 계속 공부가 진행되고 있다. 아토피한의원을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아토피질환에 대한 공부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한량 같이 게으른 필자가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은, 이름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오래되고 심한 중증의 아토피질환 환자들이 나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자가 공부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공부의 결과가 하나 둘씩 나올 때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공감할 수 없는 필자만의 만족감을 느낀다. 높아지는 치료율과 환자들이 지어주는 웃음은 '덤'이다. 피곤함 속에서도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한다.
지금은 프리허그한의원의 지점이 10개로 늘어났고 많은 의료진과 동료들도 생겼다. 모두 함께 공부하고 수많은 아토피질환 환자를 치료하며 좋은 결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필자를 놀라게 했던 그 환자는 지금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 오늘처럼 가끔 예전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이라도 그 환자를 다시 만난다면 꼭 얘기해주고 싶다. 필자가 당신 덕분에 이만큼 공부하고 성장했다고, 그 때는 부족했지만 이제는 당신을 치료해줄 수 있다고 말이다.
한편, 한의사 서산은 '아토피혁명-실용편'의 저자이자, 아토피치료병원 프리허그 서초본점의 수석원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