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원으로 국경 넘기2] 전두환 노태우의 안부를 묻던 동유럽의 시골아저씨

입력 2014-10-20 16:08
수정 2014-10-20 17:03
▲ 1990년대 후반 무렵 몰도바의 수도 키시네프의 주요 도로(사진 = 이기호)

IMF가 한창이던 1998년 여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로 가는 길에 다뉴브강을 건넜다. 양쪽 강변에는 각국의 세관이 있었고 여행자들은 배로 국경을 건넜다. 그때 배삯으로 지불했던 돈이 미화 50센트, 우리 돈 500원이었다. 부다페스트에서 브라티슬라바로 가는데 사용된 전체 여행금액은 ‘달랑’ 4.5달러 정도였다.

‘500원으로 국경 넘기’는 2007년 데일리서프라이즈를 통해 연재된 기존 원고를 약간의 수정을 거쳐 다시 게재하는 코너다. 이기호 기자의 독특한 여행담을 소개하는 코너다. 몰도바, 터키-그리스, 헝가리-슬로바키아, 우즈베키스탄, 몽골, 한국의 독도 그리고 대통령 해외순방으로 따라나섰던 멕시코-코스타리카-미국 등 총 7차례의 여행경험을 매주 토-일요일 연재하며 분량은 여행지별로 차이가 있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색다른 여유를 느껴보자.(편집자)

몰도바는 1997년 당시 인구 400만명 정도의 조그만 국가였고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아 유럽인들조차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국토는 남한의 40% 정도가 되는 나라였다. 과거 흑해연안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작은 나라들이 으레 그렇듯 몰도바의 역사도 부침이 심했다.

그래서인지 몰도바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구슬픈 멜로디를 좋아하는 국민이다. “Почему почему(빠치무, 러시아어로 의문부사 ‘왜’의 의미)”가 반복되는 구슬픈 노래가 항상 시장 인근에서 흘러나왔다. 우리의 ‘아리랑’과 상통한다. 실제로 이들은 내가 가끔 기타를 치며 부르던 동물원의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라는 노래를 뜻도 모르면서 좋아했다.

몰도바의 공용어 몰도바어는 사실 루마니아어와 거의 차이가 없다. 오히려 독립한지 6년 밖에 지나지 않아서인지 러시아어가 몰도바어와 더불어 거의 공용어 수준으로 사용됐다. 고등학생 이상의 성인들은 대부분 러시아어와 몰도바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bilinguist(2개 국어를 말할 줄 아는 사람)였고, 초등학생 일부가 러시아어를 잘 모르는 정도였다.

키시네프와 코우셴을 왕복하는 시외버스는 한국전 이전에 생산된 헝가리제였다. 정확한 제조년이 생각나지는 않지만 한국전 이전으로 기억하는 것을 보니 1945년 해방 이전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나마 하루에 몇 차례 없었다. 승용차도 벤츠, BMW가 많았지만 아주 오래된 차들, 그러니까 수동기어에 수동으로 유리창을 열고 닫는 차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 코우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사진 = 이기호)

키시네프에서 자동차로 40여분 거리의 코우셴은 지방도시였지만 아파트도 많았고 유치원부터 대학 1학년 과정까지 가르치는 규모가 큰 학교도 4개나 있었다. 어엿한 광장과 1000명 이상이 수용되는 스타디움, 웬만한 수영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야외수영장도 있었다. 모든 주택에 난방과 가스시설이 저렴한 가격에 제공되기도 한다. 다만 모든 것이 너무 낡았다.

“여자는 beautiful, 남자는…” 나를 웃긴 영어교사

키시네프에서 코우셴으로 데려다 준 이는 마이클(Michael)이었다. 영어는 서툴렀지만 책임감이 강하고 자동차 수리에 능숙했다. 코우셴까지 오는 비포장도로에서 자동차가 멈췄지만 그는 보닛을 열고 능숙한 솜씨로 차를 고쳤다. 마을을 지날 때는 양떼가 길을 다 건널 때까지 아예 시동을 꺼놓기도 했고, 천천히 걷는 염소 떼 뒤에서 한동안 서행을 하기도 했다.

코우셴의 첫 느낌은, 글쎄, 담담했다. 잿빛의 낡고 낮은 아파트들, 10월 초순에 이미 털옷을 꺼내 입은 중년의 어른들, 관리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공원과 거리, 그리고 하얀 사람들 속에 등장한 노란 이방인에 대한 사람들의 낯선 눈길이었다. 대놓고 나를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고, 이내 따라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는 꼬마들도 있었다.

오히려 나에게 가장 큰 도전은 현지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영문학과를 졸업하긴 했지만 애초 영어교육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한국인이 백인들을 앉혀놓고 영어를 가르치는 일은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이 나는 코우셴지역에서 닉이라는 미시건주 출신의 미국인을 제외하고는 가장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웃기는 일이지만 현실이었다.

현지 영어교사인 로라(Laura)는 나에게 1주일에 10시간의 수업을 요구했다. 그런데 첫 수업부터 뭐가 좀 이상하게 돌아갔다. 로라는 학생들이 나에게 가장 관심을 보이는 부분이 ‘somehand’하냐는 것이라고 했다. 문맥상으로는 분명 ‘handsome’이지만 설마 영어교사가 그런 실수를 할리는 없고 뭔가 내가 모르는 속어를 써서 기를 죽이려고 하나 싶었다.

하지만 로라가 ‘somehand’의 의미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순간 나는 한동안 뒤집어져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여자한테는 beautiful을, 남자한테는 somehand을 쓴단다. 아, 내가 지금까지 배운 영어로도 충분히 외국인강사 노릇을 할 수 있는 지역이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자신감이 솟아났다. 한국 영어의 우수성을 떨칠 절호의 기회였다.

▲ The Railroad Worker's Palace of Culture. Built in 1980.(사진 = 이기호)

“전두환과 노태우는 감옥에서 나왔습니까”

아파트를 얻는데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모든 시설이 갖춰진 월세 100달러짜리를 얻었다가 엄청난 바가지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월세 20달러짜리 아파트로 옮겼다. 첫 번째 아파트 여주인이 자기 남편이 마피아라며 옮기지 말라고 위협해 살짝 겁먹기도 했지만 그녀와 이미 이혼한 마피아 남편은 전처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는지 별다른 해코지를 가하지 않았다.

1997년 크리스마스. 옮긴 아파트는 전압이 불안했다. 전기가 계속 다운되자 위층 아저씨가 내려와서 친절하게 고쳐줬다. 고마운 마음에 학생들이 가져온 케이크의 절반을 잘라 가져다주자 한사코 들어왔다 가라고 초청한다. 하지만 그는 영어를 못했고, 나는 러시아어를 못했다. 할 수 없이 미국에서 사온 영어로 된 러시아어사전을 들고 의사소통을 시도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 남쪽인지 북쪽인지 묻기에 남쪽이라고 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오랜 기간을 보낸 사람들답게 김일성, 김정일을 먼저 말했지만 이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한국 전직대통령의 이름을 줄줄이 거론하며 박정희가 총격으로 사망한 것을 손동작으로 표현한다. “전두환, 노태우는 감옥에서 나왔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동유럽의 작은 시골 중년 남자가 한국의 정치상황을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머리가 쭈뼛해질 정도로 놀랐다. 미국인은 한국에 무관심해도 동유럽의 시골교사는 한국 군부독재의 종식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 남자는 4번 학교의 체육교사였고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 소련 카누대표선수로 참여한 경력이 있었다. 부인은 같은 학교 수학교사였다.

이때의 인연은 이듬해 봄 요긴하게 쓰였다. 1번 학교에서 계약금을 떼이고 ‘낙동강 오리알’이 된 나를 마침 4번 학교 교장으로 승진한 위층 부인이 불러준 것이다. 그새 간단한 러시아어를 깨우친 나는 “Спасибо большое(스빠씨바 발쇼에)”하며 감사를 전했고, 그녀는 웃으며 “Пожалуйста(빠좔루스따)”라고 답했다. 어느새 코우셴은 내게 제2의 고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