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드라큘라’, 슈퍼 보이스 김준수의 재발견

입력 2014-09-15 17:43
▲ 뮤지컬 ‘드라큘라’의 슈퍼 보이스 김준수(사진 = 오디뮤지컬컴퍼니)

브로드웨이 블록버스터 뮤지컬 ‘드라큘라’가 지난 5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막을 내렸다. 아일랜드 소설가 브램 스토커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이 작품은 불멸의 존재 ‘드라큘라’와 ‘미나’의 400년을 뛰어넘은 슬프고도 운명적인 사랑을 다뤘다.

넘버 ‘Loving you keeps me alive’로 대표되는 프랭크 와일드혼 특유의 웅장한 선율이 더해지면서 개막 이전부터 화제를 모은 이 작품은 무엇보다 ‘슈퍼 보이스’ 김준수의 성장을 한 번 더 확인시켰다.

김준수는 이 작품에서 비운의 뱀파이어 ‘드라큘라 백작’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특히 목소리로 전달하는 소울의 깊이가 이전보다 한층 더 깊어졌다는 평가다. 때론 음흉하고 사악하다가도, 때론 달콤하고 애절한 그의 보이스 컬러는 매 장면마다 묵직한 존재감으로 드러났다. 여태 드러나지 않았던 조금은 거칠고 남성적인 면이 그의 미성과 빗대지며 묘한 입체감을 완성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음성만으로 무대를 채울 수 있는 내공을 갖게 됐다.

김준수는 특히 감정의 과잉을 경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진 배우임을 입증했다. 감정을 폭발시킬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절묘하게 컨트롤했다. 대사 톤이나 말투 같은 사소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계산해 새롭고 매력적인 ‘드라큘라’를 창조해냈다.



‘미나’의 약혼자이자 변호사인 ‘조나단 하커’가 드라큘라 성에 도착하는 첫 장면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극 초반, 잔뜩 굽은 허리와 비틀거리며 절뚝이는 걸음, 흉측하고 깊게 패인 주름은 긴 세월의 흐름을 암시했다. 이는 오랫동안 사람의 피를 먹지 않고, 동물의 피로 연명하며 겨우 허기만 달래 온 노쇠한 흡혈귀를 형상화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새에 비해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팽팽’했다. 그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의도적으로 성대를 더 낮게 눌러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노파를 연기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준수는 이 장면에서 절제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줬다. 그는 목소리만으로 ‘드라큘라’라는 인물이 초월적 존재임을 암시했다. 이는 ‘드라큘라’가 곧 젊어질 것이라는 복선으로 작용했다.

‘뱀파이어 슬레이브’들이 ‘조나단’을 해하려 할 때 “그에게 손대지 말라”고 경고하는 장면에서는 에너지를 일순간에 폭발시키며 칼날처럼 매섭고 차가운 목소리를 드러냈다. 그의 위엄과 분노에 찬 목소리 연기에 한 관객은 “종아리까지 소름이 돋았다”며 감탄했다.

‘미나’와의 재회 후 사랑에 빠진 목소리는 또 다른 색깔이었다. 영국에서 ‘미나’와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선 중후하고 점잖은 신사의 품위를 잃지 않았고, ‘루시’를 유혹하는 장면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드라큘라’의 캐릭터 설정을 설득력 있게 담아냈다.

“이곳으로 오는 열차를 모두 탈선시켜버렸다”는 썰렁한 농담을 던질 때에는 달콤함과 담백함이 함께 읽혔다. 첫사랑에 설레어하는 순수한 청년의 모습과 여자를 웃게 하는 방법을 너무 모르는 건조한 목소리가 반전처럼 동시에 숨어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진지함과 절실함이 여전해 보였다.



400년 전 ‘엘리자베사’의 죽음을 회상하는 장면에선 전율이 느껴졌다. 죽어가는 연인을 부둥켜안고 애절하게 토해내는 절규는 보는 이의 눈가에까지 촉촉한 눈물을 짓게 할 만큼 호소력 짙었다.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신을 저주하며 오열하는 신에서는 영혼까지 파멸시킬 것 같은 잔인하고 악랄한 복수가 연상됐다. 감정의 깊이가 그만큼 깊어진 고통에 찬 목소리였다.

자신의 계획을 발설한 ‘렌필드’에게 “이렇게 날 실망시키는군”이라며 쏘아붙이는 장면에선 핏빛서린 목소리로 오싹함을 더했다. 마치 구름에 가려 반쯤 빛을 잃은 달그림자 같은 스산함이 목소리에 배어있었다.

뱀파이어 헌터 ‘반 헬싱’ 일당과 맞서 싸우는 장면에선 자신감과 잔인함이 함께 표출됐다. 특히 넘버 ‘It’s Over Play Off and Transition’는 상대를 향한 파괴적인 목소리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거친 파도처럼 휘몰아치며 포효하는 목소리에는 심장을 부숴버릴 것 같은 섬뜩함이 서려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을 그린 마지막 장면에선 슬픔과 체념이 녹아있었다. 사랑과 죽음의 갈래 길에서 “그대 없다면 내 심장이 멈추네”라고 읊조리는 모습은 ‘드라큘라’의 간절하고 순수한 사랑을 창백하게 그려냈다. 눈물에 젖은 목소리는 외로운 회한과 함께 관객의 슬픔을 더욱 배가시켰다.

“환영합니다. 원한다면 들어오시죠!”

‘조나단’ 뿐 아니라, 관객들까지 자신의 불가사의하고 쓸쓸한 트란실바니아의 성으로 초대하던 ‘드라큘라’의 목소리를 이젠 더 이상(혹은 한동안) 들을 수 없다는 게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