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우가 제대로 물을 만난 모양새다.
마냥 천진하다가도 어느 순간 내면의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든다. 아버지를 잃고 후천적으로 귀물을 보게 된 뒤, 적통왕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복형에게 왕위를 뺏긴 아픔을 지닌 이린으로 분한 정일우는 코믹함과 진지함을 오가며 시청자들을 쥐락펴락했다. 정일우를 통해 입체적으로 구현된 이린 캐릭터에 대한 호기심이 날로 증폭되고 있다.
지난 12일 방송된 ‘야경꾼 일지’ 4회에서는 밝은 모습으로 살아온 이린의 어두운 이면이 그려졌다. 비록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 태어났으나 이린은 늘 쾌활하고 씩씩한 모습이었다. 풍류를 즐기고 술과 여자를 가까이 두려는 한량의 기질을 보이며 조정과는 완전히 단절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이린의 본능이었다. 이날 방송분에서 도류 사담(김성오 분)의 도술에 걸린 기산군(김흥수 분)은 독단적으로 소격서 재건을 엄포했고 박수종(이재용 분)의 추천에 따라 이린을 제조 자리에 올렸다. 조정에 휘말리는 것은 이린으로서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청수대비(서이숙 분) 또한 “용상의 자리에 욕심을 내느냐”며 “죽은 듯이 비명조차 삼킨 채 살아라”는 모진 말로 이린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이린은 자신의 자리에 다시 한 번 회의감을 느꼈다. “존재 자체가 주상에 근심이 되는 나는 어찌해야 하나”는 말에는 적통왕자에서 오갈 곳 없는 월광대군으로, 궁을 떠도는 귀신과도 같은 존재가 돼 버린 이린의 허탈감이 어려 있었다. 장난스럽고 한 없이 밝았던 이린의 어두운 이면, 그리고 깊이 묻어두었던 가슴 속 상처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린은 등장과 함께 대부분 코믹한 면모를 뽐내며 극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죽어서도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송내관(이세창 분) 무리들과의 피할 수 없는 기 싸움은 물론이고 이날 방송에서 이루어졌던 도하(고성희 분)와의 악연에 가까운 첫 만남 역시 쾌활하고 가볍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소격사 제조로 오르며 사담과의 대결이 본격화될 것을 암시한 가운데, 이날 방송 말미에 언뜻 비춰진 이린의 진지하고 묵직한 또 다른 모습은 향후 ‘야경꾼일지’의 기대감을 드높이기 충분했다.
이린이 ‘야경꾼 일지’를 좌지우지하기 시작하면서 배우 정일우의 존재감 또한 다시 한 번 입증됐다. 특유의 반항아적인 이미지로 유니크한 매력을 살렸고 강렬한 눈빛과 미세하게 떨리는 내면 연기로 이린의 이중적인 매력을 입체적으로 부각시켰다. 그야말로 딱 맞는 제 옷을 입은 느낌이다. 정일우의 활약이 예고된 가운데, 그가 보여줄 다채로운 매력에 대한 기대감 또한 드높아지고 있다.